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도엽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옛 집은 찾아 볼 수 없고 2층 건물의 음식점이 있다. |
| 정의 | 1919년 4월 기장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했던 김도엽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북풍회/고려공산청년회/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 |
| 관련 인물 | 김약수(金若水) |
| 관련 내용 |
김도엽(金度燁,1899~1937)은 동래군 기장면 대라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기장장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였다. 같은 해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김약수의 영향으로 북풍회에 가입하고 1925년경 고려공산청년회 파견 학생으로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28년 5월 졸업하고 8월에 귀국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펼치다가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어 같은 해 12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1년 11월 출옥후 부산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하다가 1932년 부산경찰서에 다시 검거되었다. 1933년 1월에는 조선반제동맹 경성지방조직준비위원회 사건으로 다시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 병보석으로 1934년 8월 석방되었다. 199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폐쇄지적도」. 「김도엽 등 2인 판결문」, 1919년 8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도엽 등 9인 판결문」, 1919년 6월1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정칠성 등 34인 판결문」, 1935년 12월 2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중외일보』, 1930년 5월 23일, 「정석행 김도엽 예심결정서」. 『동아일보』, 1934년 8월 26일, 「반제동맹사건 김도엽 보석 출감」. 김동철·강재순, 『1920-1930년대 초 기장지역 사회운동』, 『한국민족문화』8, 한국민족문화연구소, 1996, 129·15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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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대라리 436 |
|---|---|
| 주소 | 부산 기장군 기장읍 대라리 436 |
| 도로명 주소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읍내로94번길 16 |
| 위치 고증 | 「김도엽 등 9인 판결문」과 『중외일보』 1930년 5월 23일자 기사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폐쇄지적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김도엽 관련 신문기사(『동아일보』, 1931년 11월 3일)
김도엽
김도엽 생가 터 측면
김도엽 생가 터 정면
김도엽 생가 터 우측면
김도엽 생가 터 후면과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