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일본군 조병창 의열투쟁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부평1동의 동아, 대림, 욱일아파트, 산곡3, 4동의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
| 정의 | 1938년 3월 무기제작 기술을 습득코자 조병창에 입사한 오순환과 1944년 9월 3일 조병창의 무기를 습득하여 임시정부에 인도한 황장연이 활동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 |
| 관련 인물 | 황장연(黃長淵)/오순환(吳純煥) |
| 관련 내용 |
부평 조병창은 1939년 ‘조병창’이라는 일본육군의 병기창으로 시작되었다. 1940년 4월 1일에는 부천군 부내면을 인천부에 편입하여 조병창의 면적을 확장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는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강제적으로 근로보국대를 편성하여 공사에 투입하였다. 육군 조병창은 중화학 기계산업의 전진기지로 소총과 탄약, 소구경 화포, 수류탄, 차량 등을 제작·생산하였다. 따라서 수많은 군속이 근무하게 되었는데, 공장 종사자에게 징용을 면제해 주는 특혜를 베풀기도 하였다. 월간 소총 4천정, 총검 2만정, 탄환 70만발, 포탄 3만발, 군도 2,000정, 차량 200대 등을 생산하였으며, 1944년부터는 잠수정을 생산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 지역은 일본의 대륙 병참의 핵심 전진 기지로 바뀌게 되었다. 오순환(吳純煥)은 1938년 3월 조선총독 및 일제의 고관 앞잡이를 살해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한 후 표면상으로는 체육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오순환은 거사에 사용할 병기를 구하기 위해 인천조병창에 위장 입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44년 5월 10일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간 수형하게 되었다. 1943년 3월 5일 황장연(黃長淵)은 인천조병창에서 고려재건당(高麗再建黨)을 조직하고, 1944년 9월 3일 권총 3정, 실탄 50발을 입수하여 임시정부 연락원 신교선(辛敎善)에게 인도(引渡)하였다가 조선군법회의(朝鮮軍法會議)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
| 참고 문헌 |
「오순환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황장연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부평사편찬위원회,『 부평사』1, 인천광역시 부평구, 2007, 293쪽. 『부천시문화유적분포지도』, 인천광역시·인하대박물관, 213쪽. 부평역사박물관, 『부평역사박물관 학술총서 3 미쓰비시를 품은 여백, 사택마을 부평삼릉』 『경기신문』, 2019.7.30, 「부평 미군기지 ‘일제 조병창’ 시설물 보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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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부천군 부내면 산곡리 |
|---|---|
| 주소 | 인천 부평구 인천광역시 부평구 산곡3동 산2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오순환(吳純煥) 공적조서」에는 1944년 5월 10일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간 수형했음이 기록되이 있고, 「황장연(黃長淵) 공적조서」에는 조선군법회의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부평사』 1과 『부천시문화유적분포지도』를 통해 조병창이 현재의 부평동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














일본군 조병창 터(2019)
일본군 조병창 터(2019)
일본군 조병창 터(2019)
일본군 조병창 터(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