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정동찬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생가는 멸실되고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밀양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한 정동찬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연무단/의열단/대한민국임시정부/밀양청년회 |
| 관련 인물 | 김원봉(金元鳳)/김대지(金大池)/윤치형(尹致衡)/윤세주(尹世胄)/최수봉(崔壽鳳)/김상윤(金相潤)/김소지(金小池)/박소종(朴小宗) |
| 관련 내용 | 정동찬(丁銅燦, 1896~1949)은 밀양면 내이동 991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동화학교에서 민족독립사상을 교육받았다. 동화학교 시절 김원봉·윤세주를 비롯하여 최수봉·김상윤·김소지·박소종 등과 함께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을 목적으로 연무단(練武團)을 조직하는 등 반일투쟁에 앞장섰다. 이와 같은 교육과 인적 관계로 말미암아 1919년 3월 13일 밀양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서도 윤세주·윤치형·김소지 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그 결과 일제에 체포되어 1919년 4월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0년 독립운동자금을 김대지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제공했다. 그 뒤 고향에서 청년운동에 참여했으며, 1924년 4월 밀양청년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울산군 부내면 내이동 지적원도」, 1912. 「권재호 등 20인 판결문」, 1919년 4월 4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시대일보』, 1924년 5월 10일, 「집회 강연:(밀양)청년 총회」.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12쪽. 독립운동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222~224쪽. 강만길 편, 『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127·133~140·56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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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이동 991 |
|---|---|
| 주소 | 경남 밀양시 내이동 99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권재호 등 20인 판결문」과 『고등경찰관계적록』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판결문에 기록된 주소지를 「울산군 부내면 내이동 지적원도」와 현재의 지적도를 상호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정동찬 집터 전경
정동찬 집터 우측
정동찬 집터 좌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