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장수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생가는 없어지고 상가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밀양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밀양경찰서투탄사건에 가담한 이장수가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1920 밀양경찰서투탄의거 |
|---|---|
| 관련 조직 | 의열단 |
| 관련 인물 | 윤세주(尹世胄)/정동찬(丁銅燦)/권재호(權在好)/설만진(薛萬鎭)/김소지(金小池)/박만수(朴萬守)/최종관(崔鍾貫)/정동준(鄭銅俊)/윤보은(尹輔殷)/박소종(朴小鍾)/고인덕(高仁德)/최수봉(崔壽鳳) |
| 관련 내용 |
이장수(李章守, 1897∼1960)는 밀양면 내일동에서 이도치(李道致)와 장금이(張今伊)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1일과 12일 윤세주·정동찬·권재호·설만진·김소지·박만수·최종관·정동준·윤보은·박소종 등과 13일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밀양장터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이장수는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하였으며 당시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일제 경찰과 헌병은 부산에서 급파된 10여 명의 헌병 수비대와 함께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이때 그는 체포되어 1919년 4월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10월 고인덕·최수봉 등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한 뒤, 같은해 12월 최수봉이 추진하던 밀양경찰서투탄의거를 지원하였다고도 한다.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밀양군 부내면 내일동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2. 「권재호 등 판결문」, 1919년 4월 4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매일신보』, 1919년 4월 15일,「밀양소요범인 13일에 개정, 검사의 구형은 여좌」.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238∼239쪽. 경상남도경찰부,『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1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3, 1971, 222∼22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7, 1976, 319∼321쪽. 강만길 편,『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133∼14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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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일동 516 |
|---|---|
| 주소 | 경남 밀양시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권재호 등 판결문」과 『고등경찰관계적록』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판결문」과 「제적등본」의 주소지를 토대로 「밀양군 부내면 내일동 지적원도」와 현재 지적도를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제적등본」에 의하면 1926년을 기준으로 이전에는 내일동 516번지에, 이후에는 내이동 882번지에 거주하였기에 집터는 둘 다 확인하여 둔다. |














상설시장 방면에서 바라본 이장수 집터
내이동 우체국 방면에서 바라본 이장수 집터
밀양교회 방면에서 바라본 이장수 집터
축협 방면에서 바라본 이장수 집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