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최시형 순교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개혁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지하철 종로3가역 9번 출구와 단성사 입구 사이 보도에 앞에 기념표석이 설치되어 있다. |
| 정의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좌포도청 |
| 관련 인물 | 최시형(崔時亨)/최제우(崔濟愚)/이필제(李弼濟)/전봉준(全捧準)/손병희(孫秉熙) |
| 관련 내용 |
최시형(1827~1898)은 동학의 제2대 교주이다. 그는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영해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다. 1863년 7월 북도중주인(北道中主人)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 1863년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평해와 울진, 영양에 은거하면서 신도들을 결집시켰고, 경전을 다시 필사하고 편집하여 신도들에게 읽게 하였다. 1871년 이필제의 난으로 탄압을 받게 되자, 소백산으로 피신해 영월·인제·단양 등지에서 다시 기반을 구축하였다. 1880년 5월 인제에 경전간행소를 세워『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고, 1881년 단양에서『용담유사(龍潭遺詞)』를 간행하였다.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교세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됨에 따라 1885년 충청도 보은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伸寃)을 명분으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9월 전봉준이 다시 봉기하자 그에 호응하여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897년 12월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고, 1898년 4월 5일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7월 18일 고등재판소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20일(음력 6월 2일) 좌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
| 참고 문헌 |
정교, 『대한계년사』상, 국사편찬위원회, 1974, 208~210쪽. 「해월신사」, 『天道敎書』(1920) ; 『아세아연구』통권 10호(1962~11), 314쪽. 「碧海桑田가티 激變한 서울의 녯날집과 只今집」, 『별건곤』23, 1929, 9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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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한성부 중부 정선방 파조교 동북 |
|---|---|
| 주소 | 서울 종로구 묘동 59-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천도교서』(1920) 해월신사편에 최시형이 1898년 4월 5일 관군에 체포되어 6월 2일에 중성감옥에서 72세의 나이로 순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별건곤』 제23호「벽해상전가티 격변한 서울의 녯날집과 지금집」이라는 기사의 ‘돈화문 압 널분 길로 파조교를 향하야 가면 도로 동측에 공중에 웃득이 솟슨 소방대출장소가 잇다. 이것은 전날 좌포도청지다. … 지금 단성사까지도 그 구내에 드럿다.’는 기록에 따르면, 단성사와 그 북쪽 지금의 종로소방파출소 일대가 최시형이 순교한 좌포도청 터였음을 알 수 있다. |














최시형 순교지 - 현 종로소방파출소 앞
최시형
단성사 앞에 설치된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