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용만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옛 가옥은 남아 있지 않고 군부대가 자리하고 있다. |
| 정의 |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박용만의 집이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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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1903년 상동교회에서 활동하였고,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척권 요구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7월 미국 덴버시에서 애국동지대표회를 열었고, 1910년 6월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열어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11년『신한민보』주필, 1912년『신한국보』주필로 활동하였으며, 1912년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북미지방총회대표로 참가, 외교원에 선임되었다. 1914년 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을 결성하여 단장으로 사관학교를 운영하였고, 1917년 뉴욕에서 개최된 소약국동맹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바 있다. 또 1919년 3월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을 조직하고「태평양시사」를 간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군사통일회 개최를 주도하고, 같은 해 11월 조선공화정부를 조직해 교통총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여 창조파로서 활동하면서 1924년 창조파 중심의 인사들이 설립한 국민위원회의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그후 독립군기지 개척에 힘쓰다가 1928년 베이징에서 이해명(이구연)의 습격을 받고 살해되었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박용만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동휘 등 16인 판결문」, 1924년 3월 1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方善柱,『在美韓人의 獨立運動』,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12∼14쪽. 김도훈, 『미대륙의 항일무장투쟁론자 박용만』, 역사공간, 2010, 61∼1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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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철원군 철원면 중리 |
|---|---|
| 주소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 109-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이동휘 등 16인 판결문」에 관련 사실과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고, 현재 지번과 비교하여 위치를 확인하였다. |














이승만과 박용만(앞줄 오른쪽 세번째)을 중심으로 한 하와이의 유지들(1913)
국민군단 시가행진(호놀룰루, 1917)
박용만의 사망 관련기사(『동아일보』, 1928년 10월 27일)
박용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