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허위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왕산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옛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
| 정의 | 13도 창의군 대장을 지냈던 허위가 태어난 집이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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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왕산(旺山) 허위(許蔿, 1854~1908)는 경북 선산군(善山郡) 구미면(龜尾面) 임은리(林隱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본이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탈해오자 이를 막아내기 위해 4차례에 걸쳐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그 시작은 1896년 3월 10일 김산의진(金山義陣)이었다. 그러나 미처 싸울 준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흩어진 의병들을 모아 3월 25일 김천(金泉) 직지사에서 다시 일어났으나, 이 또한 고종(高宗)의 의병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해산하고 말았다. 그 뒤 고종의 부름을 받아 정부의 요직을 거치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허위는 의병을 일으키라는 고종의 밀지를 받고, 1907년 8월 경기도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해산군인을 포섭하고, 여러 지역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경기도 연천을 본거지로 삼아, 세력을 강화하며 투쟁을 이어갔다. 또 전국 의병 연합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道倡義大陣所)를 설치한 후, 지휘부서인 원수부(元帥府)를 구성하고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에, 자신은 군사장에 올라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뜻을 꺾지 않은 허위는 임진강 유역 연합부대를 일으키고, 자신이 총대장을 맡아 다시 서울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경기도 영평군(永平郡) 한 농가에서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1908년 9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54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허위 판결문」, 대심원, 1908년 10월 3일. 『동아일보』, 1959년 10월 16일, 3면 10단,「왕산선생추도회」. 오세창,「민족운동사에서 본 왕산 허위의 위치」,『왕산허위의 사상과 구국의병항쟁』, 금오공과대학교 선주문화연구소, 1995, 86-90쪽. 김희곤 외,『왕산 허위의 나라사랑과 의병전쟁』, 구미시·안동대학교 박물관, 2005, 25·2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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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 |
|---|---|
| 주소 | 경북 구미시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구미시에서 왕산 허위를 기리기 위해 생가 터에 '왕산기념공원'을 조성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왕산기념관 이길수와 현일고등학교 전전중의 증언을 등을 종합하여 위치를확정하였다. |














허위 관련기사(『동아일보』, 1959년 10월 16일)
허위
허위 생가 터 후면
허위 생가 터 전경
허위 생가 터 우측
허위 생가 터 좌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