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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제천의병 전투지 - 충주성 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기타(성곽)
상태 멸실 / 충주성은 제천의병과 일본군의 전투로 4개 문루가 소실되었으며, 현재는 성곽터의 거의 전부가 도로에 편입되었다.
정의 1896년 2월에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점령한 후 이를 탈환하려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관련 조직 호좌의진(湖左義陣) 
관련 인물 유인석(柳麟錫)
관련 내용 1896년 2월 15일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은 충주성 공략에 나섰다. 충주는 당시 관찰부가 있어 호서지방의 요지이므로 이곳을 점거하면 호서 일대를 장악하는 발판이 되며, 이를 바탕으로 서울로 북상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충주성은 경병 400명, 왜병 200명, 지방대 500명 등 1,000여 명의 군대가 충주성에 있어 공격이 어려웠다.

2월 16일 유인석은 군사 4,000명을 거느리고 제천을 출발했다. 2월 17일 호좌의진은 지방대 두령들의 협조로 성문이 열려진 충주성의 남문과 북문을 통해 무혈 입성했다. 유인석은 입성 후 의병 토벌죄 및 단발 강요죄 등을 내세워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형하였다.

2월 17일부터는 충주성·가흥·수안보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2월 22일 중군장 이춘영(李春永)은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으로 진군하여 좌우에서 병참을 에워싸고 공격을 가하였다. 이때 일본군 7명이 병참 밖으로 나와 응사하였다. 1시간 동안의 접전에서 이춘영은 일본군이 발사한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고, 2월 23일 호좌의진은 충주성을 넘어 의진에서 기습공격을 가하는 일본군 60여 명을 격퇴시켰다. 2월 24일 성을 포위한 100여 명의 일본군은 사격을 가하는 한편 성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충주향교에 불을 질러 모든 위패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2월 29일 일본군은 단월 방면에서 2일 동안 다시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호좌의진은 근처 요해처를 지키던 군사를 성안으로 불러들여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3월 2일 가흥에서 출동한 일본군 3개 중대가 다시 충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성안으로 포를 난사하고 사다리로 등성을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의병과 일본군간에 충주성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틀간의 전투로 충주성은 모든 건물이 불타고 민가 100여 호만이 남을 정도의 폐허로 변했다.

3월 5일 호좌의진은 관군과 일본군의 양면 공격으로 양식의 공급이 어려워지자 퇴각을 결정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청풍으로 진을 옮겨야 했다.
참고 문헌 「公 제50호 忠州府폭도 궤주의 건 보고」, 「電報釜山수비대 忠州성 공격의 건」, 『한말의병자료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72쪽.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93-113쪽.
오영섭,「을미의병의 결성과정과 군사활동」, 『군사』, 국방군사편찬연구소, 2001, 101-135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충주군
주소 충북 충주시 성내동 관아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公 제50호 忠州府폭도 궤주의 건 보고」와 「電報釜山수비대 忠州성 공격의 건」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 이곳은 도로 이름으로 성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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