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덕전농장사무소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도쿠다[德田] 농장사무소는 해방 이후 신한공사 하의출장소로 이용되다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 그 위치에 하의면사무소가 신축되었다. |
| 정의 | 1920년대 하의3도(하의도·상태도·하태도) 농민들의 토지를 점유하고 수탈한 농장사무소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4∼1928 하의도농민운동 |
|---|---|
| 관련 조직 | 하의소작인회/하의도농민조합/덕전양행 |
| 관련 인물 | 김응재(金應才)/박춘금(朴春琴) |
| 관련 내용 |
하의3도(하의도·상태도·하태도)는 농지의 소유권 및 수조권을 놓고 선조 때 정명공주(貞明公主)의 부마 홍주원(洪柱元)의 후손들과 분쟁이 이어진 지역이다. 정부와 홍씨일가에 이중으로 세금을 내야 하였던 농민들은 1909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으나,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 홍씨 일가는 토지를 팔았고, 이 토지는 1919년에 다시 일본인 우콘 곤자에몬[右近權左衛門]에게 넘어갔다. 이후 우콘은 1919년 9월 덕전양행(德田洋行)에 토지를 팔았는데, 덕전양행에서는 하의면에 농장사무소를 설치하고 전직 일본인·조선인 관리들을 고용하여 농민들을 탄압하였다. 1921년에는 농장주임 미야자키[宮崎憲之]가 경찰까지 동원하여 농민들에게 과거 분쟁시 체납소작료 납부를 강요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1922년 하의소작인회를 결성하고 저항에 나섰으나 농장과 경찰측의 탄압으로 곧 해산되었다. 그러다 1922년 농민들이 덕전양행이 화해조서의 내용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고발하며 토지를 농민들에게 유상반환할 것을 요구하자, 농장측에서는 박춘금과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를 앞세워 분열을 시도하였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3도주민총회를 열고 670여명의 주민들이 모여 4개 결의안을 채택하고 김응재를 비롯한 실행위원을 선정하였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28년 1월에는 하의도농민조합을 결성하였고 일본의 노동자들도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등 활기를 띠었으나 주도자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면서 장벽에 부딪혔다. 이같이 하의3도의 토지를 둘러싼 분쟁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
| 참고 문헌 |
김학윤,『하의도농민운동사』, 책과함께, 2006, 149쪽. 『동아일보』, 1924년 1월 31일,「泣血痛恨凡三百餘年, 기구한 운명에 번롱되는 만여의 도민」. 『동아일보』, 1928년 2월 26일,「지주 德田의 간계로 하의도쟁의 재연, 상애회일파를 불러서 압박하려다가 주민의 대항으로 목적을 달치 못하여」. 김정호,『하의도-내땅찾기 300년 역사의 섬』, 한국도서학회, 1998. 신안군지편찬위원회,『신안군지』, 신안군, 2000, 166∼176쪽. 이규수, 「일제하 토지회수운동의 전개과정-전남 무안군 하의도의 사례」, 『한국독립운동사연구』1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2, 259∼288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무안군 하의면 웅곡리 |
|---|---|
| 주소 | 전남 신안군 하의면 곰실길 12(웅곡리 247-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하의도농민운동사』에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김학윤(저자) 및 하의면사무소·하의3도농민운동기념관으로부터 위치를 확인하였다. |














하의도농민운동 관련기사(『동아일보』, 1928년 2월 26일)
덕전농장사무소 터 좌측(현 하의면사무소)
덕전농장사무소 옛 모습
덕전농장사무소 터 우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