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신익희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민족주의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경기도는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하여 도문화재 제134호로 지정하고 있으며 해공신익희기념사업회에서 관리·운영하고 있다. 그간 조형물을 설치하여, 계속 보완하고 있다. |
| 정의 | 1925년 건축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신익희(申翼熙)의 생가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한민국임시정부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경기도 광주군 초월읍 서하리 출생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1894~1956)의 생가이다. 그는 광주 남한산초등학교에서 수학후 1908년 한성관립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였다. 1913년 일본와세다(조도전) 대학을 졸업한 후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강의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의원과 초대 내무차관을 지냈으며, 그 뒤 내무총장·법무총장·문교부장·외무부장 등을 두루 맡았고 국무원 비서실장과 의정원 부의장을 겸임하였다. 광복이 된 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한명으로 귀국한 그는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을 거쳐, 정부수립과 함께 제헌국회에 진출하였고, 대통령으로 뽑힌 초대국회의장 이승만(李承晩)의 뒤를 이어 국회의장이 되었다. 1947년에는 대한국민당 대표최고위원을 거쳐 1950년 한국민주당과 합당, 개편된 민주국민당의 위원장으로 뽑혔다. 그동안 그는 3선 국회의장을 역임하며, 권력 연장을 위하여 사사오입개헌까지 자행한 이승만 정권에 맞서 1956년 야당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3일 뒤인 5월 5일 호남지방에서의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중 기차 안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에게 추모표로서 185만여표가 던져졌으며, 5월 23일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그는 서울 우이동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신익희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광주시청 홈페이지(http://gjcity.go.kr) 신문학회, 『신익희:해공선생전기』, 신문학회, 1956. 류중석 외, 『해공신익희일대기』, 민족공동체연구소, 1999. 김용달, 「해공신익희와 대한민국」, 『한국학논총』, 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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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160 |
|---|---|
| 주소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길 14-34 (서하리 106-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신익희 공적조서」에 당시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광주시청 홈페이지에 의하면,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가옥이 있었으나, 을축년(乙丑年) 대홍수(1925년 ; 광주시청 홈페이지에는 1865년으로 잘못 서술하고 있다)로 집이 파손되어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하는데, 건축물대장에도 1925년에 건축된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