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창신학교 터 신사참배 거부운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1990년 창신중학교가 봉암동 신축교사로 이전하면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현재 한효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39년 7월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된 창신학교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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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으며 세력 확대를 위해 전력을 가다듬고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7년 12월 17일 중국 난징[南京] 함락 보도가 전해지자 군국주의자들은 일본군의 사기를 돋운다 하여 야간의 제등행렬을 강요한 일이 있었다. 여기에는 시내의 전 학교와 관공서가 참가했는데, 구마산에서 출발한 행렬은 신마산 신사 입구까지 일렬로 대기하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창신학교는 그 차례가 되었으나 참배를 하지 않고 지나쳤다. 이에 일본 경찰은 전 교사들을 경찰서로 연행하고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이후로도 창신학교는 동방요배, 일장기 경례, 신사참배, 교육칙어 암송 등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줄기차게 거부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던 전국의 기독교계 학교는 1936년경부터 신입생 모집중지, 폐교압력 등 일제의 교육탄압 수순대로 속속 폐교되었는데, 1939년 1월 창신학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으로부터 신입생 모집을 금지한다는 공문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당국이 내린 신입생 모집금지 조치로 더이상 학교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폐교를 위한 행정상의 절차를 밟지 않을 수 없었다. 1939년 7월 14일 전교생과 전 교원이 모인 가운데 폐교식이 진행되었다. 개교 이후 3·1운동을 비롯한 마산지역 항일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창신학교(昌信學校)는 32년만에 교문을 닫았다. 1908년 마산부 외서면 상남동에서 개교한 창신학교는 1924년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 신 교사로 이전하였다. 1939년 7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창신학교는 1948년 경남노회에 의해 초급중학교로 설립되었고, 1951년 농업고등학교로 개교한 고등학교가 1960년에 인문계 창신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90년에 현 봉암동 교사로 이전하였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동아일보』, 1924년 3월 6일, 「창신교지 확정. 『동아일보』, 1939년 2월 3일, 「존폐기로에 방황하는 마산의 창신 의신 양교」. 『동아일보』, 1939년 9월 18일, 「마산 창신 의신교, 고별식을 거행」. 창신90년사편찬위원회, 『창신90년사』, 창신중학교 외, 1998, 136~141쪽. 창신중고등학교 외, 『일제강점기 창신학교의 항일민족운동』, 2008, 7~7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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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 |
|---|---|
| 주소 | 경남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1동 415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3길 38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24년 3월 6일자 기사에는 1924년 교사를 신축해서 마산부 외서면 상남동에서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로 이전하였다는 것과 창신학교의 위치를 창원군 내서면 회원리 회산교(檜山橋) 건너편 길 동쪽으로 기록하고 있다. 「토지대장」을 통해 회원동 415번지임을 확인하였다. |














손안로 초대 교장
옛 창신학교(회원동 교사)
옛 창신학교 터(창신고등학교 교문 자리)
옛 창신학교 터 주변 회산교
옛 창신학교 터 전경(현 한효아파트)
옛 창신학교 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옛 창신학교 터
마산신사 전경
창신학교 폐교 관련기사(『동아일보』, 1939년 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