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민족주의독립운동 |
| 종류 | 기타 |
| 상태 | 멸실 / 과거 장터의 모습은 없어지고, 현재는 공터로 변해있다. 우측에는 ‘세화오일장 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어 과거 이곳에 세화오일장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
| 정의 | 1932년 1월 7일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 오일장에 모인 구좌면 하도리·연평리(우도)·세화리 해녀들이 제주도 해녀조합의 횡포에 대항해 해녀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2 제주해녀시위사건 |
|---|---|
| 관련 조직 | 제주도해녀조합 |
| 관련 인물 | 부춘화(夫春花), 김옥련(金玉蓮), 부덕량(夫德良) |
| 관련 내용 |
제주도사(濟州島司)가 회장을 겸임했던 제주도해녀조합이 본래 취지에서 벗어나 식민지 수탈기구로 전락하면서 해녀들이 채취한 생산물을 착취하는 데 열을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야학을 통해 항일 의식을 키운 제주도 구좌면 지역 해녀들이 1932년 1월 7일 구좌면 세화리 오일장에서 대규모로 해녀항일운동을 감행했다. 이 운동은 부춘화(당시 25세)·김옥련(당시 23세)·부덕량(당시 22세) 등이 주도하였다. 1차 시위는 1932년 1월 7일 세화 오일장날에 이루어졌다. 이날 구좌면·정의면 지역 해녀들은 오일장에 모여 손에는 빗창을 들고, 머리에는 수경을 끼고 제주도해녀조합의 착취를 성토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이 지역에 설립된 조합지부장은 구좌면장이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위대는 구좌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했다. 이곳에 도착한 부춘화·김옥련·부덕량 등 해녀 대표들은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면장에게 제시했으나, 면장은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며 12일에 제주도사가 오면 해결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
| 참고 문헌 |
『조선일보』, 1932년 1월 24일,「제주해녀 시위 상보, 오일내의 완전해결, 언명듣고 유유해산」. 후지나가 타게시, 「1932년 제주도해녀투쟁」, 『4·3장정』, 제주4·3연구소, 1990, 81∼117쪽. 제주해녀항일투쟁기념사업회,『제주해녀항일투쟁실록』, 1995. 제주도지편찬위원회,『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581∼590쪽. 김찬흡,『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 2005, 257쪽. 제주특별자치도해녀박물관,『제주해녀사료집』, 2009, 103∼121쪽. 김은실, 「제주해녀의 주체성과 제주해녀항일운동」, 『국가와 정치』16, 성신여자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2010, 27~69쪽. 박찬식, 「제주해녀투쟁의 역사적 기억」, 『탐라문화』30, 2007, 39~6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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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제주도 구좌면 세화리 |
|---|---|
| 주소 | 제주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1457-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선일보』, 1932년 1월 24일자 기사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세화오일장터 터 우측에 남아있는 ‘세화오일장 터’ 표지석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전경(2019)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전경(2019)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전경(2019)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전경(2019)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전경(2019)
제주해녀 항쟁시위 관련기사『( 동아일보』, 1932. 1. 26)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전경(2019)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전경(2019)
세화오일장터 제주해녀 항쟁시위지 전경(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