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강년 의병부대 전투지 - 작성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산야 |
| 상태 | 원형보존 / 일부 석축이 남아 있는 등 산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 정의 | 1908년 7월 2일 이강년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작성 의병전투 |
|---|---|
| 관련 조직 | 이강년 의진 |
| 관련 인물 | 이강년(李康秊), 하한서(河漢瑞) |
| 관련 내용 |
1908년 6월 이후 태백산 지역 등에 대한 일분군의 수색과 병력이 강화되면서 이강년 의병부대의 활동은 여의치 않았다. 이강년은 호남지방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활동기지를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대를 정비하고 무장을 보강하기 위해 배양산으로 진주하여 보관해 두었던 탄환을 찾았다. 일본군 수비대장 이시토우[石藤] 소좌는 이강년 부대가 제천과 영춘, 영월 부근에 있음을 탐지하고 충주・제천 수비대로 하여금 토벌을 지시했다. 일본군이 이강년 부대의 진군로를 막으면서 이강년 부대는 강을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영춘 산길을 경유하여 능강동으로 향하려다 소금 장사의 배를 만나 작성산(鵲城山)에 주둔할 수 있었다. 작성산은 남북으로 고개가 위치해 있어 동서 방면으로 이동로를 통제하기 좋은 위치로, 까치산성이 있기 때문에 까치산성이라고도 한다. 1908년 7월 1일(음력 6월 3일) 제천 수비대장 키지마[貴島] 소위 이하 29명은 이강년 부대가 금수산 부근에 있음을 탐지하여, 7월 2일(음력 6월 4일) 작전에 돌입하였다. 이강년은 7월 2일 오전 10시 무렵 부하를 이끌고 작성산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 왼편 발목에 관통상을 입고 계곡 쪽으로 은신하였으나 추적해 온 모리[森] 순사에게 체포되었다. 작성 전투에서 도선봉 하한서 및 의병 7명이 전사하였다. 이강년은 7월 10일 서울로 압송되어, 9월 22일 오전 11시에 경성공소원에서 처교(處絞)를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이강년에게 1962년 대한민국장을, 하한서에게는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이강년 판결문」(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 「警發 6號; 李康年 被逮에 대한 忠州警察分署長의 報告」, 1908년 7월 3일,『폭도에 관한 편책』. 「提警 第255號: 李康年 被逮에 대한 堤川警察分署長의 報告」, 1908년 7월 3일,『폭도에 관한 편책』. 「警秘收 第6038號: 李康年 被逮에 대한 堤川警察分署長의 報告」, 1908년 7월 3일,『폭도에 관한 편책』. 「忠警秘發 2號; 李康年 被逮에 대한 忠州警察分署長의 報告」, 1908년 7월 4일,『폭도에 관한 편책』. 「李康年 被逮에 대한 第一巡査隊長의 電報」, 1908년 7월 4일,『폭도에 관한 편책』. 「李康年 被逮에 대한 堤川警察分署長의 報告」, 1908년 7월 10일,『폭도에 관한 편책』. 「의병장입성」,『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11일. 「이강년의 처교」,『황성신문』, 1908년 9월 23일. 「의병장 이강년씨의 유서」,『대한매일신보』, 1908년 11월 6일. 이화중,「운강선생창의일록」,『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281쪽.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354-35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 1983, 549~550쪽. 박정수・강순희 편, 구완회 역,『국역 창의사실기』, 다운샘, 2014, 128~136쪽. 박민영, 「雲崗 李康䄵의 생애와 사상」,『한국근현대사연구』12, 한국근현대사학회, 2000, 33~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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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청풍군 북면 |
|---|---|
| 주소 |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포전리 작성 산 19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운강선생창의일록」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현재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어 현장을 확인하였다. |














작성의 석축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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