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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강년 의병부대 피습지 - 복상골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산야
상태 원형보존 / 복상골 일대 산야는 대체적으로 원형이 유지되고 있다.
정의 1907년 12월 16일~17일 이틀 동안 이강년 부대가 일본수비대와 접전하여 패배한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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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복상골 전투
관련 조직 이강년 의진 
관련 인물 김상태(金尙台)/권용일(權用佾)/이문경(李聞慶)/이만원(李萬源)
관련 내용 1907년 12월 16일(음력 11월 12일) 이강년 부대는 배양산(培陽山)으로 가는 길에 일본수비대가 가득 찼다는 정탐군의 보고에 따라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 장항령(獐項嶺)을 넘어 원도상의 집에 이르렀고, 이강년은 중군장 김상태, 선봉장 권용일과 함께 복상골에 잠시 주둔하고 있었다. 이강년은 마을의 집강과 종사 강병수를 시켜 정탐을 하였는데, 오후 늦게 갑자기 일본수비대가 기습하여 3시간 여 동안 사방에서 포위하고 사격을 퍼붓자 포군들이 황급히 흩어져 달아났다. 이강년은 별포장(別砲將) 이문경의 사격으로 적의 접근을 막으면서 임현(任縣) 서쪽의 산록으로 피하였지만, 다리에 부상을 당하였다.
다음날 방두사(旁杜寺)에 도착하여 부상 집사인 홍안동을 통해 정확한 보고를 알 수 있었는데, 중군장이 피신한 것은 알았으나 그 밖의 참모 원하정과 신숙, 신명희, 소모장 이중봉, 포군 이달 등 10인이 체포되었으며, 소모선봉 권용일 이하 7명이 전사하였다. 이강년은 이를 두고 “거의(擧義)한 지 12년에 이와 같은 패배는 없었다”며 탄식했다. 복상골 전투는 일본군의 집요한 겨울 공세의 결과였다. 이강년은 일본수비대가 다시 복상골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틸 수 없음을 알아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북상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사로잡힌 이중봉은 종신 유배형을 당하였으나 광무황제의 어명으로 해제되어 고향집으로 돌아갔으며, 신숙은 대구재판소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훈을 기리어 신숙에게 1992년 애국장을, 이중봉에게 1995년 독립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황성신문』, 1907년 12월 26일, 2면 6단,「지방소식일통」.
『황성신문』, 1907년 12월 21일, 2면 6단,「지방소식일통」.
박정수·강순희 편, 구완회 역, 『국역 창의사실기』, 2014, 94~9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255-25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70, 545쪽.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316-317쪽.
구완회, 「단양 지역의 한말 의병항쟁」, 『중원문화연구』13,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0,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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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영춘군 가야면 복상골
주소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 방북리(복상골 일대)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운강선생창의일록」(『독립운동사자료집』1)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50,000지형도(1911년 측도)에 복상골(도화동 ポクソンゴル) 이 표기되어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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