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재성의병 활동지 - 보은읍내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거리 |
| 상태 | 변형 / 위치 변화는 없으나 2008년 조사 때의 보은군청 민원과 자리에는 현재 보은읍 행정복지센터가 들어서 있다. 보은군청 본청은 그 이전인 1982년 지금의 위치(보은읍 군청길 38)로 이전하였다. 1907년 보은경찰주재소가 집무공간으로 사용하던 보은동헌(삼산로 56-14,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은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다. |
| 정의 | 1907년 8월 28일 김재성을 비롯한 의병들이 보은읍내에 들어와 일본인을 처단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7년 8월 보은지역 의병활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재성(金在性)/서상현(徐相顯)/이남규(李南奎)/조덕건(趙德建)/정운기(鄭雲淇) |
| 관련 내용 |
1907년 김재성(1862~1915)은 서상현·이남규 등과 후기의병을 이끌고 충청북도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8월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어 많은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자 이들을 이끌고 보은읍내로 들어왔다. 이들은 1907년 8월 28일 보은군 읍내에 나타나 김재성의 부하인 조덕건이 악덕 일본인 지주인 청수민치(淸水民治)의 처를 총살하였다. 다음 날 29일 의병들은 악덕 일본지주 북촌천속(北忖千束)과 그의 처, 그리고 청수민치를 함께 잡아와서 이들을 보은군청 문 밖의 주재소 앞에서 처형하였다. 김재성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는 법정에서 “이태왕(李太王) 전하의 내명을 받아 현재 의병을 일으킴을 계획 중이며, (중략) 지금 경성(京城)에서는 각도에서 모인 학자 2~3백 명이 비밀히 군사를 모집하고, 또한 민병승(閔丙昇)이란 사람이 군용금 20만 냥을 지출하기로 되어 있으니 계획이 성취되면 먼저 일본인 전부를 경성에서 격퇴하고 이완용(李完用)·박영효(朴泳孝) 등을 살해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그는 1914년 괴산에서 정운기 등과 독립운동을 계획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2003)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자칭 의병대장, 사형에 불복하고 공소신청」, 『매일신보』, 1915년 9월 2일. 「又 一적괴 상고, 유명한 폭도괴수」, 『매일신보』, 1915년 10월 20일. 「김재성 판결문」(1915년 7월 29일, 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김재성 판결문」(1915년 10월 11일, 경성복심법원). 「김재성 판결문」(1915년 11월 4일, 고등법원).『매일신보』, 1915년 9월 2일, 4면 9단, 「자칭의병대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의병항쟁 재판기록, 1974, 411-414쪽. 보은군지편찬위원회,『보은군지』, 보은군, 1994, 273쪽. 보은군지편찬위원회, 『보은군지』2, 보은군, 2016, 225~23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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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보은군 읍내면 |
|---|---|
| 주소 |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삼산로 50(삼산리 130)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재성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08년 현지조사 당시 향토사학자인 최규인의 증언을 통하여 현재 보은읍 주민센터 민원과 자리가 당시 보은군청이었으며, 동헌이 보은주재소였음을 확인하였다. |














보은군청 터 전경
헌병주재소로 사용된 보은동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