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 지역별
  • 운동별

사적지 찾아보기

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최양옥 집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열투쟁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최양옥의 집터는 현재 공군부대의 체육시설이 자리하고 있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과 비밀결사 대한독립공명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친 최양옥이 살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1920 대동단 활동/1929 우편차량 탈취
관련 조직 대동단 
관련 인물 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신덕영(申德永)/노형규(盧衡奎)/김가진(金嘉鎭)/이선구(李善九)
관련 내용 최양옥(崔養玉, 1893∼1983)은 1893년 음력 12월 5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횡성에서 3·1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후 김가진이 총재로 있는 대동단(大同團)의 조선지부 책임자 신덕영·노형규 등과 함께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11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출옥한 후 다음해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안창남·김정련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을 조직했다. 대한독립공명단은 무관학교를 세우고 병사를 양성하여 일본과의 전면전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그후 독립운동자금 마련이 여의치 않자 군자금을 모집하고 대한독립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하기 위해 김정련·이선구와 함께 1929년 4월에 국내에 잠입했다.
1929년 4월 18일 경기도 양주군 미금면과 화도면의 경계인 마석(마치)고개에서 이곳을 지나던 우편차량을 습격해 군자금을 확보하고 천마산 산중으로 도피하여 자금을 분배한 후 서울로 들어가려다 경찰에게 발각되었다. 일본 경찰의 추격을 피하다가 결국 같은 달 21일에 체포되어, 1929년 12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인천형무소장 등을 역임했다.
최양옥의 출생지인 횡성군 갑천면 화전리는 현재 횡성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둔둔리로 이사하여 생활했으며, 광복 이후에는 서울 등에서 생활하다 낙향하여 전촌리에서 살았다. 현재 그 집은 폐가로 남아 있다. 묘는 전촌리 마을 입구 옆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참고 문헌 『동아일보』, 1929년 12월 14일, 「共鳴團事件 判決, 崔養玉은 十年 懲役」.
『동아일보』, 1939년 12월 14일, 「共鳴團事件의 崔養玉 出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804∼80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7, 1976, 674∼683쪽.
「최양옥 조서」·「공판조서」; 국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41, 2000, 93∼95·224∼231쪽.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강원도 원주군 소초면 둔둔리 1019
주소 강원 원주시 소초면 둔둔리 1005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최양옥 관련 「공판조서」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최양옥이 심문과정에서 밝힌 본적지인 원주군 소초면 둔둔리 1019번지는 2000년에 둔둔리 1005번지로 합병되었다.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