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강진원 은신처 - 두모리 오성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산야 |
| 상태 | 원형보존 / 산야이므로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다. |
| 정의 | 강진원 의병장이 1910년 경부터 약 10년 동안 은거하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8-1909 의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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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강진원(姜振遠, 일명 강형오, 1881~1920)은 현재의 전라남도 순천시 서면 당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불행한 가정환경 속에서도 서당에 나아가 구학문을 수학하다가 20대에는 자신이 직접 서당을 개설하여 가족을 돌보았다. 1907년 일제의 침탈이 갈수록 기승을 부리자 강진원은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에 그는 김명거(金明巨)·김화삼(金化三)·권덕윤(權德允)·김병학(金炳學) 등과 더불어 조계산에서 거병하였다. 이들은 조계산 등을 근거지 삼아 활동하다가 인근지역에서 활동하던 조규하(趙圭夏)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곡성군 석곡면의 조지촌(鳥枝村)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조규하가 전사하면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 이들은 순천·곡성·여수·고흥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일제의 이른바‘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전개되자 이들은 남해의 섬으로 피신했다가 일제의 군사작전이 종료된 후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하지만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자 강진원은 고향인 오성산 자락의 동굴에 은신하며 국권을 되찾기 위해 암중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자 자결한 것으로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1년 8월 31일, 「往時의 의병두목 강형오 등 체포」. 민족문화협회 편, 『강진원 의병장 약전』, 횃불사, 1981. 홍영기, 「신출귀몰의 대명사 강진원 의병장의 생애와 활동」, 『순국』186호,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2006, 67-7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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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순천군 쌍암면 두모리 오성산 |
|---|---|
| 주소 | 전남 순천시 |
| 도로명 주소 |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두모길 41 |
| 위치 고증 | 『강진원의병장약전』에 관련 사실이 명기되어 있다. 현장 조사시 오성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오성사에 거주하는 정경자(65세, 전남 승주읍 두월리 거주) 씨를 통해서 동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주변에 몇 개의 동굴이 존재하고 있어 강진원 의병장이 은신하였던 정확한 동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














강진원 체포 기사(『동아일보』, 1921년 8월 31일)
강진원 은신처로 추정되는 동굴
두모리 오성산 전경
강진원 은신처 가는 길
두모리 오성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