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영동사회운동 근거지 - 영동청년회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재 교회 터는 시장 공영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고, 2008년 조사 당시 있던 영동제일교회는 영동읍 계산로2길 19-36으로 이건하였다. |
| 정의 | 1923년 8월 30일 영동소작인상조회 회원들이 영동노동동맹회를 창립하였던 청년회관이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영동노농동맹회, 영동소작인상조회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영동소작인상조회는 1923년 8월 30일 오후 2시 영동청년회관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총회는 소작인 이외에 무산자도 일치단결하여 착취 계급인 유산자에 대항하여야 한다는 이유에서 회의 명칭을 ‘영동노농동맹회’로 개칭하였다. 임총은 회칙을 개정하여 종래 소작인에 한하여 회원 자격이 있던 것을 일반 무산자에게도 회원 자격을 부여하였다. 이 같은 변화는 소작운동이 노농운동으로 확대·발전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동노농동맹회는 그 해 9월 국제 청년의 날을 맞아 선전문을 배포하고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영동노농동맹회는 1924년 3월 정기총회에서 ①소작권 이동에는 절대로 공동경작을 할 일, ②규정을 벗어나 함부로 징수한 소작료에 대해서는 절대로 수회할 일, ③강제로 징세한 제세 및 공과에 대하여는 필히 반환케 할 일, ④악덕 지주와 악덕 마름[舍音]에 대하여는 일반 사회에 공포할 일 등 4개항을 결의하였다. 이날의 결의는 지주에 대한 요구사항을 소작농 회원들이 단결된 힘으로 관철시키고자 한 노력이었다. 영동노농동맹회는 창립된 지 1년도 안되어 4~5천명의 회원을 가질 정도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러나 영동노농동맹회는 1925년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화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3년 9월 6일,「永同勞農同盟」. 『동아일보』, 1923년 9월 6일, 「永同勞農同盟 小作相助의 擴張」. 『동아일보』, 1924년 3월 18일, 「永同勞農總會」. 강호출, 「식민지시대충북영동지역농민운동연구」, 『사총』39, 고대사학회, 1991, 82~88쪽. 박걸순, 「일제강점기 충북 영동지역의 민족운동」, 『동학학보』48, 2018, 211~21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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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
|---|---|
| 주소 |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 694-16(영산로 1길 13-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1923년 2월 3일자에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2008년 현지조사에서 영동문화원 김윤호(계산리 거주)의 증언으로 당시 영동청년회관 터는 당시 영동제일교회 자리임을 확인하였다. 2021년 조사 때 당시 영동제일 교회 터는 시장 공영주차장으로 변모하였다. 영동 제일교회는 영동 초등학교 인근인 영동읍 계산로2길 19-36(지번주소 계산리 675-3)로 이건하였다. |














영동청년회관 터 전경
영동노동동맹 관련기사(『동아일보』, 1923년 9월 6일)
영동청년회관 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