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유홍석의병 창의 논의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경지 정리로 인해 지형이 변형되었다. |
| 정의 | 정미의병장 유홍석이 창의를 논의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유홍석(柳弘錫), 윤희순(尹熙順), 유중악(柳重岳), 유영석(柳寧錫), 유제곤(柳濟坤), 박선명(朴善明), 박화지(朴華芝) |
| 관련 내용 |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1907년 7월 고종퇴위사건과 정미7조약, 그리고 8월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강원도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났다. 원주에서 이인영과 민긍호, 제천에서 이강년, 홍천에서 박장호, 춘천에서 유홍석·박선명·지홍기·최천유 등이 거병하였다. 이들은 일제를 한반도에서 축출하고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항일구국운동의 표상들이었다. 유홍석(柳弘錫, 1841~1913)은 1907년 8월부터 족숙(族淑)인 유중악(柳重岳) 등과 창의를 모의하였다. 가정리 항곡(恒谷, 황골)에서 유영석(柳寧錫)·유제곤(柳濟坤)·박선명(朴善明)·박화지(朴華芝) 등과 함께 격문을 발표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의병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유인석과 교감을 이룬 상태에서 의병전쟁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유홍석은 가정리 황골에서 유영석·박선명 등과 더불어 의병 600여 명을 모아 춘천 진병산,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때 군자금과 탄약 군량이 부족하자 유중악이 농우(農牛)를 내고, 윤희순(尹熙順)은 향민으로부터 자금을 모아들여 가정리 여의내골 주산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여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는 동시에 의병을 훈련시켰다. 그러나 춘천의병은 관군에 비하여 장비가 열악했고 훈련 또한 부족하였다. 이에 유홍석은 부득이 홍천의 박장호 의진에 들어가 분전하였다. 그 후 제천 봉양면의 장담리에 머물면서 다시 군사를 모으려고 하였으나 각처의 의병이 이미 흩어져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 참고 문헌 |
춘천헌병대본부 편,『江原道狀況梗槪』, 1913. 박한설 편,『畏堂先生三世錄』, 강원일보사, 1983. 이구용,「강원도 지방의 의병항쟁」,『(增補)畏堂先生三世錄』, 강원대학교출판부, 1987, 136-138쪽. 박한설 편,『(增補)畏堂先生三世錄』, 순국선열윤희순여사기념사업추진회, 1995. 오영섭,「춘천지역 의병항쟁의 역사적 의의」,『강원문화연구』7,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02. 엄찬호, 「畏堂 柳弘錫의 항일투쟁」, 『의암학연구』 8, 의암학회, 2011, 151~1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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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춘천군 남산외면 항곡리 |
|---|---|
| 주소 | 강원도 춘천시 남면 충효로 1166-4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창의지였던 발산리 710번지 일대는 유홍석의 집(발산리 710-1) 뒤편 골짜기이다. 춘천 의병마을의 남귀우 사무국장으로부터 위치를 고증받았다. |














유홍석 의병 창의 논의지 전경(2021년 촬영)
유홍석
유홍석 의병 창의 논의지 전경(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