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군산 정미소거리 미선공 항일운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거리 |
| 상태 | 변형 / 당시의 정미소나 창고 등은 주택과 상가 등으로 변모하였다. |
| 정의 | 1924년부터 1934년까지 군산항에 밀집된 정미소 미선공들이 일제의 노동착취에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0 미선공 파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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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군산은 쌀 집산지로 많은 정미소가 있었다. 이들 정미소는 생산된 쌀을 곧바로 배에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철도변이나 항구 옆에 위치하였고, 그곳이 현재의 호남제분 끝에 집중적으로 자리하고 있어 이곳을 정미소거리라고 하였다. 1924년 당시 여기에서 일하는 발동기 기술자, 가마니운반 노동자, 무동력 정미소에서 매를 가는 매갈이 노동자, 쌀의 늬를 고르는 미선 여공 등 노동자가 남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악조건에서 중노동을 했지만 임금은 갈수록 삭감되었고, 이에 대한 생존권투쟁은 1924년에서 1934년까지 계속되었다. 1924년 3월 군산 낙합(落合)정미소에서 노동자의 임금을 내리자 매갈이 인부 32명이 16일부터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정미소에서 임금을 7전에서 점차 2전 8리로 내리자 동맹휴업을 단행한 것이다. 1926년 11월에는 군산정미소 직공 1,000여 명이, 1928년 1월에는 중정정미소 직공이, 1930년 2월에는 남선정미소 직공 36명이, 동년 10월에는 육석정미소 직공 100여 명과 흑전정미소 직공 88명이 파업을 단행하였다. 급기야 12월에는 1,000여 명의 미선공(米選工)이 파업을 계획한 비밀집회가 발각되어 주동자 2명이 체포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었다. 1934년 1월에는 가등정미소 여직공 100여 명이 임금문제로 파업에 들어갔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4년 3월 17일, 「群山 落合精米所 매가리 職工罷業, 원인은 삭전내린 까닭으로 다른 정미소직공들도 응원」. 『동아일보』, 1930년 2월 15일, 「撰米工의 盟罷, 삭을 올려 달라고, 群山南鮮精米」. 『동아일보』, 1930년 10월 18일, 「陸石精米所 米選工 盟罷, 시간 단축과 임금 증액 등 要求條件不應으로」. 『동아일보』, 1930년 12월 14일, 「千餘米選工 總罷業 發覺, 군산의 각 정미소 직공이, 主動嫌疑의 數名 점거」. 『동아일보』, 1934년 1월 17일, 「가등정미소 여공 이백명 일제 파업, 주모 삼명을 검거하는 것 보고, 데모야기하자 전부 검속」. 『조선일보』, 1930년 10월 18일, 「군산 흑전정미공 구십명 맹파, 공임 팔십전을 요구」. 『군산일보』, 1933년 1월 1일, 「군산부구획확장지도」. 保高正記,『 群山開港史』, 群山府, 1925, 220∼223쪽. 김양규,『우리 고장의 항일운동사-옥구농민의 항일항쟁사』, 군산문화원, 2001, 191∼202쪽. 김중규,『군산역사이야기』, 나인, 2002, 243∼24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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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군산부 본정 2정목 |
|---|---|
| 주소 | 전북 군산시 장미동 28-1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1924년 3월 17일 기사, 1930년 2월 15일자 기사, 1930년 10월 18일자 기사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군산부구획확장지도」와 김양규(전 군산문화원장)의 증언을 토대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














군산 정미소거리(1920년대)
군산 정미공장 풍경(1920년대 말)
군산 정미소거리에서 본 내항
군산 정미소거리
가등정미소 터 앞 거리 - 현 군산시장 공영주차장
군산 가등정미소 터
군산 정미소거리(우측 화강정미소 터)
미선공 항일운동 관련 기사(『조선일보』, 1930년 1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