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조병옥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조병옥의 생가는 멸실되어 현재 논으로 변해 있다. |
| 정의 | 흥사단·신간회·수양동우회 등에서 활동한 조병옥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흥사단/수양동우회/조선사정조사연구회/수양동우회/신간회 |
| 관련 인물 | 안창호(安昌浩)/이광수(李光洙)/서재필(徐載弼)/신흥우(申興雨)/ 이윤재(李允宰)/주요한(朱耀翰) |
| 관련 내용 |
조병옥(趙炳玉, 1894∼1960)은 1911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해 3월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미국에서 안창호가 민족운동의 지속적 추진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1913년 결성한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했다. 그는 귀국 후 1925년 7월 이광수의 집에서 수양동맹회에 가입했으며, 같은 달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차 태평양회의에 서재필·신흥우 등과 조선대표로 참석했다. 같은 해 9월 15일에는 국내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함께 조선사정조사연구회(朝鮮事情調査硏究會)를 결성했다. 1926년 1월 5월 이윤재·주요한 등과 수양동우회의 기관지 『동광(東光)』을 창간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 창립에 참여해 1929년 1월 총무간사로 선임되었으며 같은 해 7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교육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같은 해 9월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던 중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민족언론육성에 진력하던 중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피체되어 2년간의 예심 끝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광복후에는 경무부장, 내무부장관,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등을 역임하고, 1959년 1월 대통령후보에 올라 유세하던 중 신병으로 인해 도미(渡美)하여 치료하다가 1960년 2월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향산광랑(이광수) 등 41인 판결문」, 1940년 8월 2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조병옥,『나의 회고록』, 어문각, 1963. 이수일, 「1920년대 중후반 유석 조병옥의 민족운동과 현실인식」, 『구천원유한교수정년기념논총』혜안, 2000, 389∼46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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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천안군 동면 용두리 327 |
|---|---|
| 주소 |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308-3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향산광랑(이광수) 등 41인 판결문」과 「수형인명부」 등에 본적이 천안군 동면 용두리 327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지적도와 비교하고 지역주민의 고증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조병옥 생가는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261-10에 복원되어 있으나 「판결문」과 「수형인명부」의 본적지를 따라 위치를 비정하였다. |














흥사단 입단 당시 조병옥 이력서
해방 이후의 조병옥
흥사단 발기 당시 조병옥
젊은 시절의 조병옥
유관순 생가에서 본 조병옥 생가 터 원경
용두리 방향으로 본 조병옥 생가 터
조병옥 생가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