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상호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음식점 및 분식집이 들어 서 있어 옛 흔적은 없다. |
| 정의 | 1942년 5월 결성된 대구공립상업학교 태극단에서 활동한 이상호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태극단 |
| 관련 인물 | 이상호(李相虎)/김상길(金相吉)/서상교(徐尙敎)/김정진(金正鎭)/이준윤(李浚允)/이원현(李元鉉)/윤삼룡(尹三龍) |
| 관련 내용 |
이상호(李相虎, 1926~1945)는 대구상업학교 재학중 1945년 5월, 같은 학교 학생 김상길·서상교 등과 항일학생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일본군 입대반대 등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내용의 유인물을 뿌리는 한편 동지규합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 결과 1943년 4월에 김정진·이준윤·이원현·윤삼룡 등을 규합하였으며 계속해서 학교단위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또 5월에는 단원 전원이 대구시 앞산인 비슬산(琵瑟山) 약수터에 모여 결단식을 가졌고, 여기에서 그는 단장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태극단은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용두산(龍頭山)·비슬산 등에서 학술연구토론회, 각종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다. 더불어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 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상호는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단기 5년, 장기 10년형을 언도받고 김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5년 12월 9일에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대구지적도」, 1927(대구향토역사관 소장). 「수형인명부」( 대구광역시중구청 사무소),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3, 1977, 834~84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9, 1983, 781~790쪽. 조춘호,『태극단학생독립운동』, 대구상업정보고등학교총동창회, 2001, 19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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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봉산정 31 |
|---|---|
| 주소 | 대구 중구 봉산동 37-1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125-7 |
| 위치 고증 | 「수형인명부」와『태극단학생독립운동』에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1927년「대구지적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이상호
이상호 생가 터 정면
이상호 생가 터 원경
이상호 생가 터 근경
이상호 생가 터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