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삼천포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새 교사를 신축하면서 옛 교사의 원형은 확인할 수 없다. |
| 정의 | 1931년 11월 27일 삼천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군 당국의 비교육적 처사에 반발하여 동맹휴학을 전개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1.11.27 삼천포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1931년 11월 27일 삼천포공립보통학교 5·6학년 학생 60여 명은 무산(無産) 아동이 미납한 수업료 대신 가산(家産)을 차압한 군(郡) 당국의 처사에 반발해서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27일 오후 1시경 일본인 교장에게 6개조에 걸친 요구서를 제출한 학생들은 교문을 나와 선전문 60~70매를 살포하고 시내를 돌아다니며 만세를 고창하였다. 학생들이 제출한 요구서의 내용은 '가산 차압을 즉시 폐지할 것, 무산 아동에 대한 수업료를 철폐할 것, 노예교육 절대반대, 학생자치권 완전획득, 이완원(李完元, 1학년 교사) 배척, 경찰의 교내 침입 절대 반대' 등이었다. 교장과 학부형들이 조정에 나서면서 30여 명의 학생이 복교(復校)하였다. 한편 삼천포경찰관주재소에서 동맹휴학과 관련한 주동자 검거에 나서, 용의자를 검거하여 비밀리에 조사하였다.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는 수업료 체납 아동에 대한 가산 차압에서 비롯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불량아동을 소탕하겠다고한 군 당국의 의지와도 관계된 사건이었다. 결국 2명의 학생과 2명의 청년이 구류 처분 받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삼천포공립보통학교는 1905년 4월 장응상(張應相)이 사재를 투자하여 설립한 사립 광명의숙(光明義塾)이 1917년 3월 공립으로 전환하여 개교한 학교이다. 1941년 4월 삼천포일출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50년 6월 삼천포국민학교로, 1996년 3월 삼천포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泗川郡 三千浦面 仙龜里 地籍原圖」, 1914. 『南鮮日報』, 1931년 12월 2일,「三千浦普通學校 學童 盟休を決行」. 『동아일보』, 1931년 12월 3일, 「宣傳文撒布하며 萬歲高唱코 示威, 삼천포공보생 대소동, 월사 미납에 차압이 원인」. 『동아일보』, 1931년 12월 6일, 「兒童과 靑年 五名을 護送」. 『동아일보』, 1931년 12월 13일, 「主謀者 四名에 二十日 拘留, 삼천포보교사건」.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면 선구리 |
|---|---|
| 주소 | 경남 사천시 선구동 112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사천시 각산로 10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31년 12월 3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사천군 삼천포면 선구리 지적원도」와 「토지대장」을 통해 정확한 지번과 위치를 확인하였다. |














삼천포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관련기사(『동아일보』, 1931년 12월 3일)
삼천포공립보통학교생 단체사진
삼천포공립보통학교(현 삼천포초등학교)
삼천포공립보통학교 - 현 삼천포초등학교 교문
삼천포공립보통학교 - 현 삼천포초등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