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춘천농업학교 학생운동지-청평사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복원 / 청평사는 6·25전쟁 때 구광전·사성전 등이 소실되었으며, 보물 제165호로 지정된 청평사 회전문만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웅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건물은 전쟁 이후에 복원된 것이다. |
| 정의 | 1937년 6월 춘천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7.6.1 춘천공립농업학교 학생 동맹휴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준환(李俊桓)/반영균(潘榮均)/김창경(金昌卿)/정태화(鄭泰和)/이종엽(李鍾燁)/고광돈(高光敦) |
| 관련 내용 |
춘천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1937년 6월 1일에 학생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일본인 교장 노나카[野中鼎]의 유임과 그를 모함한 교무주임 나카노[中野久雄]를 포함한 일본인 교사 4명의 배척을 요구하며 청평사에 들어가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6월 1일 새벽에 280여 명의 학생들은 농성지로 예정된 청평사로 출발했다. 이 농성을 주동한 학생들은 이준환(李俊桓)·반영균(潘榮均)·김창경(金昌卿)·정태화(鄭泰和)·이종엽(李鍾燁)·고광돈(高光敦) 등이었다. 이들은 학교측과 강원도 내무부 학무과에 '1. 노나카 교장의 유임과 나카노 교무주임의 축출, 2. 실습시간의 단축과 학과 이론의 확장, 3. 기숙사 급식 제도의 개선과 자율적 운영 방안'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 동맹휴학은 춘천공립농업학교의 동맹휴학 가운데 최대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학교, 경찰은 물론 지역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학교 측은 경찰과 학부모를 앞세워 신분 보장을 약속하며 학생들을 회유했다. 학생들은 교무주임 나카노를 비롯한 기피 인물을 추방한다는 언약을 받고 전원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사흘 동안 농성을 벌였으나 학부모와 교사들의 회유와 설득이 계속되고, 주동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동맹휴학은 끝나고 말았다. 청평사(淸平寺)는 973년(광종 24) 영현선사(永賢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했다. 1555년(명종 10) 보우(普雨)가 이곳에 와서 청평사로 개칭했고, 대부분의 건물을 신축했다. 6·25전쟁 때 구광전과 사성전 등이 소실되었다가 1977년 이래 꾸준히 중건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
| 참고 문헌 |
『조선일보』, 1937년 6월 3일, 「춘천농교맹휴사건 점차로 확대」. 『조선일보』, 1937년 6월 3일, 「진맹휴, 절간 농성」.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 「學生側態度 强硬 學父兄을 召集, 春川農校 盟休 後聞」. 『동아일보』, 1937년 6월 16일, 「春川農校 解決, 아직까지 無可望」. 『동아일보』, 1937년 6월 18일, 「春川農校 盟休, 아직도 解決못해」. 春川農業高等學校同窓會, 『春農七十午年의 脈絡 : 1910-1984』, 1984, 323~326쪽. 김흥수, 『춘천항일독립운동사』, 춘천문화원, 1999, 336~3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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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춘천군 북산면 청평리 |
|---|---|
| 주소 | 강원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길 81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춘천칠십오년의 맥락』을 통해 당시 학생들이 청평사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음을 확인하였다. |














청평사 극락보전(1920년대)
청평사 전경(2021년 촬영)
춘천농업학교 동맹휴학 관련기사(『동아일보』, 1937년 6월 16일)
춘천농업학교 동맹휴학 관련기사(『동아일보』, 1937년 6월 5일)
청평사 전경(2021년 촬영)
청평사 전경(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