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조선노동공제회 회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재 ‘성심필방’ 등이 입주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 노동운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가 1921년 11월부터 1922년 10월 분립할 때까지 회관으로 사용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노동운동 |
|---|---|
| 관련 조직 | 무산자동맹회/조선노동연맹회/서울청년회/조선노동총동맹 |
| 관련 인물 | 박중화(朴重華)/윤덕병(尹德炳)/김사국(金思國)/차금봉(車今奉) |
| 관련 내용 |
조선노동공제회는 3·1운동 이후 신사조와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노동사회의 지식계발과 환난구제 등을 표방하고 1920년 4월 11일 창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 노동운동단체이다. 창립 당시의 임원진은 회장 박중화를 비롯해 대부분이 언론인, 교육가, 변호사 등 지식인 출신들이었다. 1921년 4월 정기총회에서는 회장제를 집행위원제로 바꾸는 조직개편을 단행하고, 1922년 4월 정기총회에서는 의사회를 폐지하고 중앙집행위원회의 기능을 강화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의 진출이 두드러졌으며, 지회도 15개 지역에 걸쳐 조직되었다. 이후 조선노동공제회는 1922년 7월 “소작인은 단결하라”는 ‘소작인선언’을 발표하며 이전의 계몽활동에서 한 걸음 나아가 보다 적극적인 운동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장덕수계·윤덕병계·차금봉계 등 공제회 내 사회주의 계열과 비사회주의 계열, 사회주의 계열 내부 분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혼란한 상태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무산자동맹회의 윤덕병 등이 1922년 10월 15일 임시총회를 열어 조선노동공제회의 해체를 결의하고 10월 18일 조선노동연맹회를 결성하자, 서울청년회의 김사국 등과 손잡은 차금봉 일파는 임시총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조선노동공제회를 고수하였다. 이후 윤덕병 일파의 조선노동연맹회는 화요회·북풍회계의 세력기반으로, 차금봉 일파의 조선노동공제회는 서울청년회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갔다가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이 출범하면서 다시 단일 대오로 엮이게 되었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0년 4월 12일, 「노동공제회 창립, 십일일 광무대에서」. 『동아일보』, 1921년 11월 29일, 「노동공제회 이전」. 『동아일보』, 1922년 7월 13일, 「共濟會의 一大風波, 간부간의 싸홈이나 칼질까지, 중상자는 두 명 가해자는 체포」. 「대한지후(大寒之後)」, 『개벽』 7, 1921년 1월, 197-20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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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인사동 39 |
|---|---|
| 주소 | 서울 종로구 인사동 39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21년 11월 29일자에 조선노동공제회가 경성부 인사동 39번지 회관건축지로 이전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개벽』 7권에 의하면 조선노동공제회는 창립 이후 경성부 종로2정목 67번지 회관에 입주에 있다가 1921년 11월 인사동 39번지로 이전하였다. |














조선노동공제회 회관 터
조선노동공제회 창립 기사(『동아일보』, 1920년 4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