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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상진 집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국내독립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현재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의 1915년 8월 조직된 광복회의 총사령관 박상진이 살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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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관련 조직 상덕태상화/조선국전회복단/풍기광복단/광복회 
관련 인물 박상진(朴尙鎭)/허겸(許蒹)/손일민(孫逸民)/김대략(金大洛)/이상룡(李相龍)/김동산(金東三)/채기중(蔡基中)
관련 내용 박상진(1884~1921)은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서울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에 판사둔용시험에 합격하여 평양지방재판소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손일민·김대락·이상룡·김동삼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1913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 가입하였다. 그 해 8월에는 풍기로 가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이끌던 채기중과 합의하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였다.

광복회는 만주지역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전쟁을 펼치기 위한 조직이다. 만주 독립군 기지에 보낼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점을 운영하고 친일부호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마련하는 활동을 펼쳤다. 대구권총사건, 장승원 처단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1918년 광복회 조직이 드러나면서 붙잡힌 그는 1920년 9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21년 8월 사형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박상진 등 40인 판결문」, 1918년 10월 1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박상진 판결문」, 1920년 11월 4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1년 8월 18일,「박상진의 시체, 십삼일 경주도착」.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179~183쪽.
김희곤,『박상진자료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32~47·164~183쪽.
이성우,「광복회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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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북도 경주군 외동면 녹동리 469
주소 경북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469-2~6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박상진 등 40인 판결문」및「박상진 판결문」과『고등경찰요사』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재되어 있다. 동네 주민 윤병동(53세)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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