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좌진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
| 상태 | 복원 / 1991년 성역화 사업을 추진해 본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전시관을 건립했다. |
| 정의 | 광복회·대한군정서·신민부·한족총연합회 등에서 활동하였고,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김좌진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0 청산리전투/1921 자유시참변 |
|---|---|
| 관련 조직 | 신민부/한족총연합회/광복회/기호흥학회/길림군정사/대한군정서/대한독립군단/대한독립의군부 |
| 관련 인물 | 서일(徐一) |
| 관련 내용 |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은 1889년 음력 11월 홍성군 갈산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호명학교 설립에 참여하고, 홍성지역의 재능있는 학생들을 선발해 서울에 유학시키는 등 홍성지역 근대교육에 앞장섰다. 1907년경 서울로 상경한 후 신민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기호흥학회·대한협회 등에 참여해 계몽운동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국망 후 독립자금 모집 중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에는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광복회에 참여해 자금모집에 전념했으며, 1917년 광복회 만주부사령으로 파견되었다. 김좌진은 1918년 길림에서 조직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 참여하면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며 1919년 3월 중순 길림군정사를 조직하고, 같은 해 서일의 연합제의에 따라 대한군정서에 참여했다. 대한군정서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서대파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김좌진은 대한군정서군을 이끌고 1920년 10월 백운평·천수평·어랑촌 전투 등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전투 이후에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1925년 북만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해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신민부 총사령관 및 군사부위원장으로 군사부문의 책임을 맡아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1929년 7월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해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산시에서 고려공산당원인 쏜 흉탄에 순국했다. |
| 참고 문헌 |
「故金佐鎭先生略歷」, 1930년. 송상도,『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316∼319쪽. 이을규,『是也金宗鎭先生傳』. 『동아일보』, 1930년 2월 13일, 「兇報를 確傳하는 白治 金佐鎭 訃音, 北滿 ○○運動者의 巨頭, 四十二歲를 一期로」. 『동아일보』, 1930년 2월 14일, 「幼年부터 武藝絶人 豪膽과 俠氣의 四十平生」. 신용하,『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 을유문화사, 1985, 45·119·219·407·429·433·454·491쪽. 박환,『대륙으로 간 혁명가들』, 국학자료원, 2003, 132∼166쪽. 박영석,「白冶 金佐鎭將軍 硏究」,『 국사관논총』51, 국사편찬위원회, 1994, 185∼216쪽. 이성우,「백야 김좌진의 국내민족운동」,『호서사학』44, 호서사학회, 2006, 53∼8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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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8 |
|---|---|
| 주소 |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330-1 |
|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546번길 12 |
| 위치 고증 | 「김좌진 제적부」에 본적이 갈산면 행산리 338번지로 되어 있으며, 행산리 338번지 일대에 생가와 기념관이 복원되어 있어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백야사 앞에 세워져 있는‘백야사정비’
백야공원에 세워져 있는‘고대한독립군사령백야김좌진장군추념비’
백야사(정면)
백야사 - 김좌진 사당 전경
김좌진 생가(정면)
김좌진 생가 전경
김좌진 생가 입구
김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