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민영환 묘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묘소 |
| 상태 | 원형보존 / 묘에는 곡담, 장명등, 문인석 등이 있다. 묘역 옆에 관리사무소가 있고, 후손이 거주하며 묘를 관리하고 있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
| 정의 |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자결한 민영환의 묘소가 있는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5 을사오적 탄핵 상소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조병세(趙秉世) |
| 관련 내용 |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서울 견지동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개화정책을 지지하여 갑오내각에서 1895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되었으나 명성왕후 시해사건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아관파천 후 특명전권공사로서 제정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고, 그후 유럽 여러 나라를 순방했다. 그는 서구 각국을 견문하고 돌아와서 고종에게 우리나라도 대대적인 근대적 개혁을 단행하고 민권을 확장하여 독립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고, 육군 제도만이 일부 개혁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더불어 조약의 폐기를 상소하였다. 그러나 을사오적의 탄핵으로 평리원(平理院)에 대죄(待罪)하다 석방되었다. 그 후 11월 30일에 동포와 각국 공사들에게 영결(永訣)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민영환의 묘는 애초 수진면 토월리(수지구 풍덕천동 토월마을)에 봉분없이 평장되었다가 1942년 후손들에 의해 지금 자리로 이장되었다. 1959년 3월 묘역 안에 신도비를 건립하였으며,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보낸 유서를 새겨 놓았다. 묘비 앞면 글씨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썼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민영환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58년 11월 30일, 「오늘 閔忠正公 殉國記念日」. <민영환씨 순절유서>《공립신보》1907년 11월 15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이인영, 『내 고장 용인 독립운동사』, 용인군, 1995. 김명섭,『한국사가 기억해야할 용인의 근대역사인물』,노스보스, 2015,31∼42쪽 용인문화원 편, 『한국독립운동과 용인』, 노스보스, 2019, 59~6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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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용인군 구성면 마북리 |
|---|---|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7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민영환의 묘는 구성초등학교 뒤편 마북동 544-7번지에 조성되어 있다. 묘역 내에는 안내판, 묘지, 신도비가 있어 민영환의 묘임을 알려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