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서상돈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주상복합빌딩인 대구 신성미소시티를 건립하면서 옛 집을 허물고 복원하였다. 부지는 당초보다 축소되었다. |
| 정의 |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던 서상돈이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독립협회/대구광문사 |
| 관련 인물 | 김광제(金光濟) |
| 관련 내용 |
서상돈(徐相敦, 이명 徐相燉, 1850~1913)은 1898년부터 독립협회(獨立協會)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1907년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898년 3월부터 전개된 만민공동회에 독립협회 재무담당 간부로 참가하여, 러시아의 내정간섭을 규탄하고 민권보장 및 참정권 획득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그는 대구로 내려와 대구광문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실학자들의 저서를 출판하여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그는 1907년 1월 대구광문사의 특별회에서, 김광제(金光濟) 사장과 함께 일제에 빚진 1,300만원을 갚기 위한 금연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800원을 선뜻 내놓았다. 이렇게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서울의 『대한매일신보』에 국채보상취지서가 발표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서상돈 등은 1907년 2월 대구 북후정(北堠亭)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군민대회를 열고 국채지원금 수합사무소(收合事務所)를 설치하였다. 이를 시발로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일대 사회운동으로 발전하여 나갔다. 국채보상운동은 1년 4개월여 이상 지속되어 보상기금을 모았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없었지만, 일제의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한 한국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 집은 1891년 서상돈이 직접 지은 집이라고 한다. |
| 참고 문헌 |
「서상돈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장지연, 「단연상채문제(斷烟償債問題)」, 『대한자강회월보』 9, 1907년 3월, 1~3쪽. 『대한자강회월보』 9, 1907년 3월, 「잡록 : 단연보국채, 국채보상계, 국채보상취지서」, 57~62쪽. 『조선총독부관보』, 1914년 7월 16일, 「휘보 : 포상 - 목배하사」. 『매일신보』, 1913년 4월 18일, 「부호의 빈민구제」. 사)거리문화시민연대, 『대구 新택리지』, 북랜드, 2009, 258~25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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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동 |
|---|---|
| 주소 | 대구 중구 남산동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6-1 |
| 위치 고증 | 『대한자강회월보』 제9호의 「단연상채문제」 및 「잡록」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서상돈 고택이 남아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서상돈
서상돈 집 우측면
서상돈 집 전경
서상돈 집 후면
서상돈 집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