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정근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초가였던 것을 집터는 유지하고 신축하여 옛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
| 정의 | 1919년 3·1운동 당시 발안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정근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3·1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백낙열(白樂烈), 안정옥(安政玉), 김흥렬(金興烈), 김영태(金永泰), 홍원식(洪元植), 안종후(安鍾厚), 권종대(權鐘大), 안봉순(安鳳淳), 김정헌(金正憲), 강태성(姜泰成), 김성열(金聖烈), 이연규(李演珪), 이우연(李愚然), 안진순(安珍淳) |
| 관련 내용 |
이정근(李正根, 1856~1919)은 팔탄면 가재리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학에 정진하여 28세부터 한학을 가르쳤다. 33세에 궁내부 주사가 되었다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화성 여러 지역에 한문서당을 열어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일본이 3년을 못가서 망한다’는 뜻에서 ‘왜왕3년’이라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다가 일제 경찰로부터 수차례의 고문과 폭행을 당하였다. 1919년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그는 일본의 음모로 독살된 것이라고 분격했으며, 인근 각지의 동지들로 하여금 밤마다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서울을 향해 망곡제를 드리게 하여 일제 경찰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3월 20일 그는 서울의 동지에게서 전달받은 독립선언문을 복사, 각지의 지도급 동지 800여 명에게 전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30일 그는 수촌리의 백낙열, 고주리의 김성열, 제암리의 안정옥 등과 함께 3월 30일 발안장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이정근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화성시·수원대학교 박물관,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 화성시, 2003, 326-327쪽.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가재리-001(임야원도_0001)」, 19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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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 가재리 350 |
|---|---|
| 주소 |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가재울길 36-17(가재리 35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국가보훈처 공적조서에 주소가 기재되어 있으며,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 보고서』, 화성시·수원대학교박물관, 2003, p326~327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집터자리를 확인하였다. 또한 현재 집터에 손자가 거주하고 있으며, 마을 이장 및 같은 전주이씨 종친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