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상정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1920년대 지어졌으나, 현재 음식점으로 사용되고 있어 일부 변형되었다. |
| 정의 |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신한민주당 등에서 활약한 이상정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신한민주당 |
| 관련 인물 |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윤봉길(尹奉吉)/신익희(申翼熙)/장건상(張建相)/이현수(李顯洙)/홍진(洪震)/강창제(姜昌濟) |
| 관련 내용 |
이상정(李相定, 1896∼1947, 이명 이연호[李然皓])은 대구에서 태어났다. 시인 이상화(李相和)의 맏형이다. 일본에 유학해 도쿄[東京]의 국학원(國學院)을 수료한 후 1917년경 귀국하였다. 귀국 후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와 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1년부터 1923년까지 경신학교(儆新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5년경 만주로 망명해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6~1927년에는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활동하다가, '서북국민부대'가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 정규군 소장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이와함께 김구·김규식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윤봉길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기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충칭[重慶]에 있는 육군참모학교의 교관을 지냈으며, 1938년에는 김구·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및 외교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40년 9월에는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2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자, 그는 신익희·장건상·이현수 등과 함께 연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45년 2월에는 홍진·강창제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였으며, 이때 그는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경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중국군 중장으로 진급하여 광복 후에는 북지방면(北支方面)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1947년 9월 환국하였으나 40여일 만인 10월 27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유고출판위원회, 『이상정장군 유고 중국유기(李相定將軍遺稿中國遊記)』, 청구출판사, 1950, 1·162∼163쪽. (사)거리문화시민연대,『대구新택리지』, 북랜드, 2007, 262쪽. 최기영,「이상정(1897∼1947)의 재중독립운동」,『역사학보』200, 역사학회, 2008, 346∼3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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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명치정 2정목 |
|---|---|
| 주소 | 대구 중구 계산동2가 90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약령길 25-1 |
| 위치 고증 | 「이상정(1897∼1947)의 재중독립운동」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상정장군 유고 중국유기』에 국내외에서의 활동 사실이 간략히 기록되어 있다. 향토역사관 이호 학예사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이상정 집 정면
이상정 집 원경
이상정 집 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