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백정기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원래의 가옥은 멸실되고 현재 건물은 복원된 것이다. |
| 정의 | 중국을 무대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던 무정부주의자 백정기가 망명 전에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3 육삼정(六三亭)사건 |
|---|---|
| 관련 조직 | 재중국무정부주의연맹/항일구국연맹/흑색공포단 |
| 관련 인물 | 이강훈/원심창/정화암/이회영 |
| 관련 내용 |
백정기(白貞基, 1896~1934)의 호는 구파(鷗波)로 전라북도 부안군 동진면 출신이다. 1907년 정읍으로 이주한 그는 이곳에서 결혼하고 10여 년간 거주하였다. 1919년 서울에 올라가 3·1운동을 목격한 뒤 고향에 돌아가 동지를 규합하여 일제와의 무장항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8월 동지 4명과 함께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물을 파괴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자 만주로 피신하였다. 다음 해 겨울 재차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에 잠입하여 활동 중 서울 중부경찰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무정부주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1924년 4월 이회영·정화암 등과 북경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연맹을 조직하였고, 9월 일본관헌의 탄압을 피해 상해로 가서 정화암 등과 함께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에 들어가 폭탄제조기술을 익히는 한편 노동문제에 관한 이해를 깊게 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5·30 총파업이 일어나자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들과 더불어 노동운동을 전개하고 10만여 명 단위의 대노동자조합을 만들어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1년 11월 한국·중국·일본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적의 국경기관 및 수송기관의 파괴·요인 사살·친일파 숙청 등을 목표로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여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상해 홍구(虹口)에 있는 일본요정 육삼정(六三亭)에서 연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과 함께 습격하려다 잡혀 일본 나가사키법원[長崎法院]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33년 7월 12일, 「유길공사 암살계획한 조선인 3명 終豫, 범인 등 長崎에 호송」. 「원심창 등 3인 판결문」, 1933년 11월 24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779~78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35쪽. 이호룡, 『아나키스트들의 민족해방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136~13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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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북도 고부군 영원면 은선리 734 |
|---|---|
| 주소 | 전북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갈선부락 734 |
| 도로명 주소 |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 갈선1길 17-13 |
| 위치 고증 | 「원심창 등 3인 판결문」에 백정기의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고, 그 터에 집이 복원되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














백정기 무기징역 선고 판결문
백정기의 의열투쟁 관련기사(『동아일보』, 1933년 7월 12일)
백정기기념관과 동상
백정기기념관 내 사당
백정기 집 정면
백정기 집 후면
백정기 집 측면
백정기 친필 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