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태원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김태원이 태어난 곳으로 1953년 초가로 다시 지었으며, 1960년대 중반 목조건물로 신축하고 지붕을 개량하였다. |
| 정의 |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특파원과 광복군사령부·벽창의용대 등에서 활동했던 김태원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0 벽창의용단 평북지역 의열투쟁 |
|---|---|
| 관련 조직 | 대한민국임시정부/광복군사령부/벽창의용단 |
| 관련 인물 | 김구(金九)/김용원(金庸源)/이용담(李龍潭)/주상옥(朱尙玉)/정창화(鄭昌和)/안경근(安敬根)/김의환 |
| 관련 내용 |
김태원(金泰源, 1900∼1952)은 회덕군 홍도리(현, 대전 홍도동)출신으로 족형인 김용원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충북지역 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옥천과 대전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 후 남만주에 있는 광복군사령부에 참여해 이용담·주상옥·정창화 등과 평안북도에 들어가 대관면의 일제 경찰주재소 및 창성주재소를 습격해 일제 경찰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2년에는 광복군사령부 직할로 조직된 벽창의용대 단원으로 참여해 평안북도 벽동과 창성군 일대에서 군자금모집과 일제 경찰 및 밀정을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4년 봄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중 신의주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1925년 신의주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1926년 9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다시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태원은 복역 중 탈옥해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김의환·안경근 등과 함께 김구 휘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동하였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6년 7월 1일, 「碧昌義勇團 金泰源 死刑」. 김상기 편,『애국지사 강산 김용원』, 경인문화사, 2004. 48∼5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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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공주부 회덕군 외남면 홍도리 |
|---|---|
| 주소 | 대전 동구 홍도동 133-10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태원의 아들인 김정인에 의하면, 김태원은 이곳에서 태어나 7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














김태원 친필시(확대)
민영환의 혈죽도에 쓴 친필시(네모)
김태원
김태원 생가 전경
김태원 사형판결 관련기사(『동아일보』, 1926년 7월 1일)
김태원 생가(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