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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정화암 생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종류
상태 원형보존 / 방 2개와 툇마루, 부엌으로 구성된 일자형 가옥으로 보존되어 있으나 주변 관리가 미흡하다.
정의 3·1운동과 해외독립운동에 앞장선 아나키스트 정화암이 태어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33 육삼정(六三亭) 일본공사 살해계획
관련 조직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흑색공분단 
관련 인물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
관련 내용 정화암(鄭華岩, 1896~1981)의 이명은 현섭(賢燮) 또는 윤옥(允玉)이다.

1919년 3·1운동에 만세시위에 참여한 뒤 1920년에 독판부(督辦部)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어 1921년에 중국 베이징으로 피신하였다. 1924년부터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박열(朴烈)·신성모(申性模) 등 아나키즘 독립운동가들과 만나 무력을 사용한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폭탄제조 기술 습득 및 군자금 확보를 기도했다. 이 무렵 중국의 혁명운동가인 리스쳉[李石曾]·우중후이[吳鍾暉] 등과 제휴하여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31년 1월 원심창(元心昌)이 상해로 건너와 정화암과 합류하자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파 및 전향자 등을 사살하였다. 1933년 3월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 등과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상해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를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해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거사 직전에 검거되었다. 1936년에는 국내 호서은행에서 5만 7천원을 탈취하여 기관지『남화통신(南華通信)』을 창간하였다.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원심창 등 3인 판결문」, 장기지방재판소, 1933년 11월 23일.
「오면직 등 5인 판결문」, 해주지방법원, 1937년 4월 16일.
독립운동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7-의열투쟁사, 1976, 774-775쪽.
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자유문고, 1982, 341쪽.
「정화암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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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북도 김제군 월촌면 장화리
주소 전북 김제시 장화동 214-1
도로명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장화2길 152-9
위치 고증 「원심창 등 3인 판결문」과 정화암의 회고록『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 관련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조영옥(72, 모악향토연구회)의 고증으로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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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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