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황현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광양시에서는 1999년 생가복원계획을 수립하였고, 2002년 생가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
| 정의 | 한말 우국지사이자 학자로서 일제의 국권병탄에 항거하여 자결한 매천 황현이 태어나서 1886년 구례 만수동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 |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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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황현(黃玹, 1855~1910)의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으로 전남 광양 출생이다. 그는 황시묵(黃時默)과 풍천노씨(豊川盧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그는 시문에 능하였으며, 1888년 성균관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히며 관직 진출을 단념하고 구례의 만수동에 은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청일전쟁·갑오개혁이 연이어 일어나자 후세에 귀감을 남겨주기 위하여『매천야록(梅泉野錄)』과『오하기문(梧下紀聞)』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저술은 한국근대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1905년 11월‘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김택영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협의하였으나 일이 여의치 않아 포기하였다. 그는 이후『매천야록』을 쓰면서 칩거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정부 고위관료의 무능과 부패함을 낱낱이 기록하여 강력히 비판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생가 부근에 묘소도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황현,『 매천집』, 1911. 이장희, 「황현의 생애와 사상」, 『아세아연구』21, 고려대아세아문제연구소, 1978, 241-266쪽. 광양시지편찬위원회,『 광양시지』3, 광양시, 2005, 385-38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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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광양군 봉강면 서석리 |
|---|---|
| 주소 | 전남 광양시 봉강면 석사리 758 |
| 도로명 주소 | 전라남도 광양시 봉강면 서석길 14-3 |
| 위치 고증 | 『매천집』에 관련 사실이 명기되어 있고 생가가 복원되어 있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있다. |














성균생원황현전(김택영 찬)
황현
황현 생가 후면
황현 생가 정면
황현 생가 좌측
황현 생가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