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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나철 생가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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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열투쟁
종류 가옥
상태 복원 / 옛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2009년에 새로 복원되었다.
정의 대종교 창시자이자 을사오적의 암살을 시도한 독립운동가 나철이 태어나 자란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관련 조직 자신회/단군교/대종교 
관련 인물 이기(李沂)/오기호(吳基鎬)
관련 내용 나철(羅喆, 1863~1916)은 전라남도 낙안현 남상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홍암(弘巖)이며, 이명은 나인영(羅寅永)이다.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지내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6월 이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천황과 일본 정부 요인에게 '동양 평화를 위해 한(韓)·청(淸)·일(日)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등을 주장하는 서신을 보냈다. 같은 해 11월 귀국하였다. 1906년 1월 오기호 등과 함께 참정대신 박제순(朴濟純)과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등 을사오적을 처단하려고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동지규합과 거사자금을 모금하여 비밀결사인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였다. 1906년 1월부터 3월까지 모두 네차례에 걸쳐 을사오적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그는 1907년 7월 평리원에서 10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으나 같은해 12월 특사로 풀려났다.

1909년 1월 단군교(檀君敎)를 창시하고, 1910년 7월 대종교(大倧敎)로 교명을 개칭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나라를 병탄하자 만주로 망명하여 북만주 10여 곳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펼치는 한편 항일운동에 헌신하다가 귀국하였다. 1916년 8월 15일(음력 9월 15일) 황해도 구월산의 삼성사(三聖祠)에서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며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교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7년 생가의 복원작업이 시작되어 2009년 완공되었다.
참고 문헌 「나인영 등 31인 판결문」, 1907년 7월 3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매일신보』, 1916년 9월 17일, 「大倧敎 都司敎 逝去, 구월산 삼성사에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 1970, 322쪽.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독립문화사, 1971, 13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7, 1976, 24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8, 1976, 720~748쪽.
보성군사편찬위원회, 『보성군사』, 1995, 309쪽.
벌교100년사편찬위원회, 『벌교100년사』, 2007,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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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낙안군 남상면 금곡리
주소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115
도로명 주소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녹색로 5147-25
위치 고증 「나인영 등 31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생가가 복원되어 있어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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