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서재필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2003년에 주요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
| 정의 | 서재필의 외가로 그가 태어나 여섯 살 때까지 성장하며 교육을 받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884. 갑신정변/3.1만세시위운동/1921.11 세계군축회의/1925. 범태평양회의 |
|---|---|
| 관련 조직 | 독립협회/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산하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 |
| 관련 인물 | 서광하(徐光夏)/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永曉)/하딩(Harding, Warren Gamaliel) |
| 관련 내용 |
서재필(徐載弼, 1866~1951)은 외가인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서광효(徐光孝)와 성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이며, 보성의 외가에서 출생하여 7세 때 충남 대덕의 7촌숙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4세에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그는 김옥균의 영향으로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1884년 갑신정변에 적극 가담하였으나 3일 만에 실패하자 일본을 거쳐 이듬해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조지워싱턴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에 귀화하였다. 갑오개혁을 추진하던 박영효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1896년 4월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정부와 마찰을 빚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의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서 외교활동을 맡았다. 대표적인 외교활동으로는 1921년 11월 세계 군축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한 것과 1922년 1월 미국 대통령 하딩(Harding, Warren Gamaliel, 1865~1923)을 면담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 것이 있다. 1925년에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7년에 귀국했다가 대통령 출마 계획이 여의치 않자 이듬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그가 태어난 집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는데 2003년에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참고 문헌 |
「서재필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 1919년 5월 1일, 「외교를 담임한 서재필박사」. 박은식, 『박은식전서』 상, 1975, 181·27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 1972, 33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1977, 89쪽. 보성군사편찬위원회, 『보성군사』, 보성군, 1995, 306쪽. 홍선표, 『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최기영, 『서재필이 꿈꾼 나라』, 푸른역사, 2010, 20-24쪽. 김승태, 『서재필:독립협회를 창설한 개화·개혁의 선구자』, 역사공간, 2011, 11-17쪽. 정진석, 『선각자 서재필:민족을 위한 ‘희망의 씨앗’을 뿌리다』, 기파랑,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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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동복군 문덕면 가천리 |
|---|---|
| 주소 |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내길 18-3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보성군사』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생가가 복원되어 있어서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서재필 생가(2022년 촬영)
서재필 생가(2022년 촬영)
서재필 생가(2022년 촬영)
서재필 생가(2022년 촬영)
『독립신문』창간호(1896년 4월 7일)
서재필(좌)과 안창호(192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