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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법린 집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국내독립운동
종류 가옥
상태 변형 / 현재는 거주자가 없는 상태이다. 당시의 원형에서 조금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정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김법린이 체포될 당시 살았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3 동래장터 독립만세시위/1938.3 만당사건/1942.10 조선어학회사건
관련 조직 조선어학회/만당/만당 동경지부 
관련 인물
관련 내용 김법린(金法隣, 1899~1964)은 3·1운동 당시 동래장터 만세시위에 관여한 후, 같은 해 4월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0년 의용승군을 계획하고 국내로 돌아왔으나 좌절되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 파리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1928년에 귀국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30년 5월에는 만당(卍黨)을 조직하여 일본 동경지부 책임자로 활동했고, 1938년 8월 만당사건으로 체포되어 진주경찰서에서 3개월 정도 수감되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가,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형을 언도받고 출옥하였다.

해방후 불교중앙총무원장으로 불교혁신운동에 힘썼으며 동국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법린이 살았던 곳은 범어사 소유로 1945년 6월에 30-5번지에서 30-7번지로 분번되었고 현재 개인소유이다.
참고 문헌 「토지대장」.
「폐쇄지적도」.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東萊郡 北面 靑龍洞 地籍原圖」, 1912.
「김법린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 1929년 11월 28일, 「사회 각계 유지를 망라, 조선국어사전편찬회 조직」.
금정중학교, 『금정중학교100년사』, 새부산문화사, 2006, 68·76·86·105~108쪽.
금정중학교, 『백년의 숨결, 천년의 향기』, 2007.
송진모, 「일제하 김법린의 불교혁신론과 범어사」, 부경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석사논문, 부경대학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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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동래군 청룡리 30-5
주소 부산 금정구 청룡동 30-7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신한민보』 1929년 11월 28일자와 『금정중학교100년사』 등에 관련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김법린의 차남 김인봉의 증언에 따라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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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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