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규채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이규채 생가는 완전히 멸실되고, 현재 금성기계 공장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등에서 활약한 이규채가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定員),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신한독립당(新漢獨立黨) |
| 관련 인물 | 이규채(李圭彩) |
| 관련 내용 |
이규채(李圭彩, 1888~1948)는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 484번지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청성학교(靑城學校)에서 후진교육에 힘쓰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계기로 물러났다. 1919년 3·1운동 후에는 남녀학생을 상대로 비밀운동을 전개하다가 1921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4년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충청도의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25년에 사임하였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정치부 위원 겸 군사부 참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며 민족진영의 결속을 위해 크게 활약하였으며, 한국독립당군을 편성했다. 1932년에는 한국독립당 총무위원장이 되었으며, 본부를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옮기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부를 옮김에 따라 한국독립당군은 해체하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국 지린 육군 제3군 상교참모(上校參謀)가 되어 활약하였으며, 1934년에는 난징에 본부를 두고 있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과 한국독립당이 제휴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자 감찰위원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9월 25일에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국민연맹대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독립당 이규채사건 경찰신문조서) 신문조서」 朝鮮總督府 警務局,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簿』, 朝鮮總督府, 1934, 29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 1972, 725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5, 1973, 623·626·696쪽. 포천군지편찬위원회, 『포천군지』 상, 1997, 405~406쪽.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3, 2000, 39~41·96~10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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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방축리 484 |
|---|---|
| 주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가산로 96번길 9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한국독립당 이규채사건)이규채 신문조서」 및 『국외에서의 용의조선인명부』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근처에 살던 후손 이종세(이규채 조카)의 증언으로 생가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














이규채 관련기사(『조선중앙일보』, 1935년 3월 6일)
이규채 관련기사(『조선중앙일보』, 1935년 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