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정순만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
| 상태 | 변형 / 집이 남아 있으나 변형이 심한 상태이다. |
| 정의 | 한말 국권회복운동과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정순만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양성춘사건 |
|---|---|
| 관련 조직 | 독립협회/덕신학교/서전의숙/신민회/십삼도의군부/성명회/권업회/관일약 |
| 관련 인물 | 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유근(柳瑾)/나철(羅喆)/안창호(安昌浩)/남궁억(南宮檍)/양기탁(梁起鐸)/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김구(金九)/이회영(李會榮)/김학만 |
| 관련 내용 |
정순만(鄭淳萬, 1873∼1911)은 청주군 서강외이하면 덕촌리에서 아버지 정석종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6년 3월 이승만·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에 참여하였고,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 도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유근·나철·안창호·남궁억·양기탁 등 367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02년경 고향에서 덕신학교를 설립하여 구국교육에 힘썼으며, 만주로 망명하여 간도 용정에서 이상설·이동녕·여준 등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키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7년 안창호·김구·이동녕·양기탁·이회영 등과 함께 신민회에서 활동하였고, 헤이그특사의 여비 18,000원을 한인회장 김학만과 함께 교포로부터 모금, 전달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을 전후하여 노령에서 활약하였으며, 1910년 연해주지역에서『해조신문(海潮新聞)』·『대동공보(大東共報)』등을 발간하는 동시에 13도의군부(十三道義軍府), 성명회, 권업회, 관일약(貫一約) 등을 설치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연해주 지역에 한인 사회의 갈등으로 일어난 양성춘(楊成春) 사건에 연류되어 양성춘의 가족들에게 보복 살해당했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정순만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한민보』, 1911년 7월 26일, 「정순만씨가 암살을 당하였다함」. 『신한민보』, 1911년 8월 9일, 「원동소식: 정씨 피살전말」. 김현구,「검은유전」, 하와이대학교, 1987, 279쪽. 광복회 충청북도지부,『충청북도 독립유공자공훈록』, 2001, 391쪽. 신세라, 「정순만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25, 한국근현대사학회, 2003, 229쪽. 박걸순, 「검은 정순만의 민족운동 연구」, 『2008 충북의 역사문화인물 학술세미나』, 충청북도, 2008, 51∼9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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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청주군 서강외이하면 덕촌리 |
|---|---|
| 주소 | 충북 청주시 옥산면 덕촌1리 185 |
| 도로명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광촌길 9 |
| 위치 고증 | 「정순만의 생애와 민족운동」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에 거주하는 정현태(69)·안춘기·정충모가 생가 터를 증언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














정순만 사망기사(『신한민보』, 1911년 8월 9일)
정순만 생가 터 원경
정순만이 참여한 서전서숙
정순만 생가 터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