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강철구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후손인 강석모의 소유로 되어 있으나 당시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고 공터로 남아있다. |
| 정의 | 대한군정서원으로 독립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던 강철구가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대한민국임시정부/천영학교 |
| 관련 인물 | 서일(徐一) |
| 관련 내용 |
강철구(姜鐵求, 1894∼1943)는 1920년 1월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비서가 되었으며, 같은 해 4월 국내에 파견되어 고향인 부여에서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6월 또다시 국내로 파견되어 서울과 부여에서 자금모집과 동지규합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는 같은 해 10월부터 부여 각 면에서 자금을 모집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대종교 포교에 진력하는 한편, 1928년 3월까지 연길현 천영학교(天英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을 하였다. 1942년에 만주 동경성에 대종교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같은 해 11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1943년 10월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강철구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대한군정서 사관양성자금 모집사건 경찰신문조서) 강철구 신문조서」·「(대한군정서 사관양성자금 모집사건 예심신문조서) 예심종결결정)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8, 국사편찬위원회, 1999, 134∼138·229∼232쪽. 「잠칭 임시정부 공채모집자 검거」; 조선총독부 경무국, 『최근에 있어서 조선치안상황』, 1922. 『동아일보』, 1923년 2월 15일, 「獨立軍政署事件, 姜鐵求等 七名 豫審決定(上)」. 박걸순, 「扶餘 長亭 晋州姜氏 門中의 대종교 신앙과 민족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34, 한국근현대사학회, 2005, 75∼7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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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73 |
|---|---|
| 주소 | 충남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73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강철구 공적조서」와 「(대한군정서 사관양성자금 모집사건 경찰신문조서) 강철구 신문조서」에 본적과 주소지가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73번지로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지번과 일치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였다. |














강철구 군자금 모집 관련기사(『동아일보』, 1923년 2월 15일)
강철구 집터
강철구 군자금 모집 관련기사(『동아일보』, 1922년 12월 24일)
강철구 집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