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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응 집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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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현재 이소응의 집터는 강촌펜션 중심지 사이에 유일하게 개발하지 않은 땅으로 남겨져 있다.
정의 춘천의병장 이소응이 살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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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관련 내용 이소응(李昭應, 1861~1928)은 춘천 출신으로 본관은 전주이며, 일명 의신(宜), 호는 습재(習齋)이다. 이항로의 제자 유중교에게 배웠으며, 1889년 가을 유중교가 제천으로 이주한 후에는 스승의 뒤를 이어 춘천 가정리의 가정서사를 맡아 운영하였다.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11월 단발령이 반포된 이후 각지에서 항일의병이 일어날 때에 춘천에서 의병장에 올랐다. 그는 위정척사의 대의를 내세워 일본과 개화파를 물리쳐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엄한 규율로 부대를 통솔하였다. 이어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내려오는 조인승을 붙잡아 처단하였다. 서울진격전을 목표로 가평으로 출동한 춘천의병이 벌업산에서 패배하자 병력 보강을 위해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 협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맹영재에게 붙잡혔다. 유인석의 도움으로 풀려난 뒤 제천의병에 합세하였다. 유인석 의진에서 군무도유사를 맡아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만들어 의진의 기강을 확립하고 의병항쟁의 책략을 연구하였다.
1896년 5월 25일 제천의병이 장기렴의 관군에게 패하여 서북행의 장도에 오르자 유인석을 따라 서북행을 결행하였다. 그러나 황해도 금천지역에서 잠시 머문 후에 다시 남행하여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였다. 1898년 윤1월 유인석의 서한을 받고 만주 통화현 오도구로 들어가 재기를 다짐하는 한편, 「척화거의사실대략(斥和擧義事實大略)」을 저술하여 그간 벌인 의병항쟁의 대의를 밝혀놓았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다시 서간도로 들어가 유인석·유홍석 등과 함께 의병을 모아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913년 유홍석이 타계하고 이어 1915년 유인석이 서거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조국광복을 꿈꾸며 후학을 양성하며 하며 지내다가 1930년 4월 23일 봉천성 강평현에서 7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참고 문헌 이경응,『李景應實記』, 필사본.
오영섭,「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북한강유역의 유학사상』,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8.
춘천문화원,『習齋李昭應의 生涯와 活動』, 2005.
춘천문화원 역,『(國譯)習齋先生文集』, 2005.
정재경, 「습재 이소응선생과 춘천 을미의병」, 『춘천문화』 20, 춘천문화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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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강원도 춘천군 남산외이작면 하방곡리
주소 강원도 춘천시 남산면 강촌구곡길 14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國譯) 習齋先生文集』1권에서 이소응은 자신의 집 주변 산수를 묘사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강촌문화마당 한희민씨의 자문을 통해 당시 이소응의 집터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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