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저한당 - 윤봉길 성장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1972년까지 유족이 거주했으며 1973년 정부에서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정의 |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폰탄투척의거를 거행한 윤봉길이 태어나 중국 망명 전까지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2.4.29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의거 |
|---|---|
| 관련 조직 | 위친계/월진회/한인애국단 |
| 관련 인물 | 김구(金九) |
| 관련 내용 |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은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봉길은 별명이고, 본명은 우의(奉吉)이며, 아호는 매헌(梅軒)이다. 윤봉길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을 목격하고 식민지 현실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이후 학교를 자퇴하고 1921년부터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수학하면서 신학문보다는 구학문에서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려는 방법을 찾고자 했으며, 묘표사건(墓標事件)을 계기로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했다. 농촌계몽을 위해 야학을 개설하고 강연회와 학예회 등을 개최했으며, 경제자립운동으로 위친계와 월진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1929년 봄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토끼와 여우’라는 학예회를 개최한 일로 체포되어 일제 경찰에게 곤욕을 치르면서 농촌계몽운의 한계를 절감하고 1930년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망명 후 1932년 봄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같은해 4월 29일 일제의 천장절과 일본군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는 홍구의거를 거행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5월 25일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18일 상하이[上海]를 출발해 오사카[大阪]의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2월 18일 밤 가나자와[金澤]로 이송되었으며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시외의 미츠코지 육군작업장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저한당은 1973년 윤봉길 성역화 사업으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참고 문헌 |
내무성 보안과,『上海に於ける尹奉吉爆彈事件顚末』, 1932. 일본육군성,『滿密大日記』, 1933,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 도서실 소장자료. 신용하,「尹奉吉의 農民運動과 民族獨立運動」, 『한국학보』81, 일지사, 1995, 102~132쪽. 「윤봉길 수형인명부」,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형목,「윤봉길의 현실인식과 청년운동사상 위치」,『한국민족운동사연구』33,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2, 43~63쪽. 김희곤,「자료소개·헤제: <尹奉吉判決書>と<'金九逮捕' のための韓人愛國團圓審問調書>」, 『백범과 민족운동연구』5, 백범학술원, 2007, 351~460쪽. 김상기,「尹奉吉의 上海義擧에 대한 日本언론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3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5~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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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 |
|---|---|
| 주소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윤봉길의「수형인명부」에 본적지와 출생지가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9번지로 되어 있다. 출생지는 광현당이었으며,「수형인명부」에 기록된 시량리 139번지는 현재 중수된 저한당의 지번과 일치한다. 1928년 2우러 설립한 부흥원이 복원되어 었다. |














윤봉길 피체장면(1932년)
윤봉길이 두 아들에게 유서를 대신하여 쓴 시(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윤봉길 순국 전(왼쪽)과 후(오른쪽) 사진(1932년)
매헌윤봉길의사사적비
저한당(정면)
윤봉길의사 동상
저한당 내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