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강릉측후소 미국방송 청취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문화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재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
| 정의 | 1943년 강릉측후소 직원 4명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의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내용을 주위에 전파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
| 관련 인물 | 장승태(張承台)/정창교(鄭嵢敎)/염세근(廉世根)/이창호(李彰鎬) |
| 관련 내용 |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는 1943년에 이르러 중국 충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부와 미국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에서 각각 ‘한국말 방송’을 하여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고무시켰다. 특히 주미외교위원부의 한국말 방송은 미군의 태평양에서의 전승을 보도하면서 국내 동포들에게 일제의 징병 징용에 응하지 말고 군수품 수송을 방해하는 등 반전운동을 전개하라고 권고하였다. 일제는 불리한 전황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엄격하게 보도 통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1942년부터 강릉측후소에 근무하던 장승태(張承台)·정창교(鄭嵢敎)·염세근(廉世根)·이창호(李彰鎬) 등은 1943년에 주미외교위원부의 단파방송을 듣고 전황을 알게 되었다. 이들은 측후소를 사직한 뒤 강릉·삼척·영월 등지에서 반전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다른 측후소에서도 주미외교위원부의 단파방송을 듣고 사람들에게 전파한 것이 삼척경찰서에서 발각되어, 1943년 11월 20일을 전후하여 이들 4명을 포함 16명이 각지에서 체포되어 3~10개월 동안 옥고를 겪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
| 참고 문헌 |
「강릉측후소 설치」, 『조선총독부관보』제329호, 1911년 9월 30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1977, 818쪽. 조동걸, 『태백항일사』, 강원일보사, 1977, 311~313쪽. 광복회 강원도지부,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 Ⅲ, 1992, 490~491쪽. 강릉항일운동얼선양회, 『강릉지방항일독립운동사』, 2010, 212~213쪽 강원지방기상청, 『강원지방기상청백년사:1911~2011』, 2011, 66ㆍ178ㆍ180쪽 「강원지방기상청 신청사 건립 난항」, 『강원일보』, 2006년 10월 16일 「강릉측후소(1930)」(『강릉문화원, 사진으로 보는 강릉 명주의 근대 풍물』, 1992) 「1930년 강릉측후소에서 본 강릉시 전경」(『강릉문화원, 사진으로 보는 강릉 명주의 근대 풍물』, 19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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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강릉군 강릉읍 용강리 |
|---|---|
| 주소 |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 63-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 9권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관보』제329호(1911.9.30)에 따르면 강릉측후소는 1911년 9월 강릉군 북이리에 설치되어 2008년 강원지방기상청이 이전할 때까지 그 자리에 있었다. 1930년대 「강릉시가약도」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였다. |














강릉측후소 미국방송 청취지(2021년 촬영)
강릉측후소 미국방송 청취지 전경(2021년 촬영)
1930년 강릉측후소에서 본 강릉시가지
1930년 강릉측후소
강릉측후소 미국방송 청취지(2021년 촬영)
강릉측후소 미국방송 청취지 전경(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