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용규 묘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묘소 |
| 상태 | 원형보존 / 광산김씨 미양공파 선영 뒤편에 위치해 있다. 때마다 관리는 되고 있는 것 같으나, 전체적으로 수풀이 우거져 있다. 묘비에 ‘3.1독립운동애국지사’라고 쓰여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10일 전남 광주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이끌었던 김용규의 묘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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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복현/김강/서정희/최병준/송흥진/최한영/한길상/김종삼/김범수/박일구/최정두/김기형/김태열/손인식/강석봉/남궁혁/이기호/박경주/범윤두/정광호/최기순 |
| 관련 내용 |
김용규(金容圭, 1898-1924)는 1919년 3월 6일 전남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남궁혁의 집에서 김복현(金福鉉)·최병준(崔丙浚)·송흥진(宋興眞)·최정두(崔正斗)·한길상(韓吉祥)·김태열(金泰烈)·강석봉(姜錫奉) 등과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용규와 참석자들은 김강으로 부터 서울의 만세시위소식을 전해 듣고, 광주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시위 날짜와 시위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역할분담을 논의하였다. 3월 8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한다는 것,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는 조선인 청년이 담당한다는 것, 인쇄용지 1만장은 강석봉이 구매한다는 것, 인쇄용기는 숭일학교 소장의 등사판을 사용한다는 것, 숭일학교·광주보통학교 학생들에게 권유하여 만세시위에 참가하게 할 것 등이 그것이다. 김용규는 한길상과 함께 남궁혁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인쇄를 담당하였다. 일제 경찰의 감시와 다른 사정으로 인쇄가 어렵게 되자, 광주면 김언수(金彦洙)의 집으로 옮겼다. 이곳에서도 인쇄가 힘들게 되자, 3월 8일 광주면 향사리 최한영(崔漢泳 )의 집으로 이전하여 다음날 9일 저녁까지 최정두가 집에서 가져온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경고문 등 수천 통의 인쇄를 마쳤다. 인쇄를 마친 후, 김용규는 김강·최한영·김종삼·한길상 등과 함께 다음날 있을 만세시위의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논의하였다. 만세시위는 오후 3시 30분부터 광주 큰 시장에서 시작될 것이며, 독립선언서 등의 인쇄물의 배포, 집합 시간의 고지, 운동 참가 권유 등에 대해서 활동 방침이 정해졌다. 김용규는 부동정 방면과 남문통 일대에서 독립선언서 50여통을 교부하는 임무를 맡았다. 드디어 거사 당일 예정된 시간이 되자 김복현 등이 광주교(光州橋) 아래 모인 수백 명의 군중 앞에 나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의 시작을 알렸다. 이에 군중들이 호응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여기에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합세하여 1,0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루었다. 이들은 시장을 출발하여 서문통을 경유하여 우체국 앞을 행진하는 등의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용규는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곧바로 몸을 숨겨 일제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 이후 1919년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 참고 문헌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0(국내3·1운동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85-18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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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곡리 315, 광산김씨 미양공파 선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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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소 | 전남 담양군 창평면 유곡리 315-1, 광산김씨 미양공파 선영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묘비가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














김용규 묘비석(2022년 촬영)
김용규 묘(2022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