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고재천 집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변형 / 오래된 집의 형태는 남아 있으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로 변해 있다. |
| 정의 | 1926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건아단을 조직하고 농촌계몽활동을 전개했던 고재천이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성원(金聲遠)/우종휘(禹鐘徽)/김찬도(金燦道)/권영선(權永善)/남영희(南榮熙)/김문찬(金汶贊)/김봉일(金奉日)/김익수(金益洙)/황봉선(黃鳳善)/육동백(陸東百)/백세기(白世基) |
| 관련 내용 |
고재천(高在千, 1905-1981)은 전남 담양 출신이다. 고창(高敞)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입학하였다. 수원고농에 재학 중이던 1926년 여름, 김성원(金聲遠)우종휘(禹鐘徽)·김찬도(金燦道)·권영선(權永善) 등과 항일학생결사 단체인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였다. 건아단은 민족사회에 이바지하지 위해 농민대중을 계발하여 신사회를 건설할 것을 목적하였다. 이들은 농촌사회의 계발이 곧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보고 농촌계몽운동에 힘썼다. 수원 인근의 여러 마을에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조직 이름을 계림흥농사(鷄林興農社)로 위장 변경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건아단 출신으로 김해공립농업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김성원이 일제경찰에 체포되었고, 조직 이름을 다시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로 변경하였다. 이후 사건이 확대됨에 따라 조직과 활동이 드러나게 되어 고재천도 1928년 9월 일제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수원고농에서 퇴학처분을 받았으며 18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미결수로 고문을 받았다. 1930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
| 참고 문헌 |
김승학, 『한국독립사』(하), 독립문화사, 1971, 31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6, 546쪽 서울농대, 『수원농학 70년』, 1976, 50-52쪽. 담양군지편찬위원회, 『담양군지』, 담양군, 1994, 140쪽.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사회·사상운동자료 해제』 1, 2007, 67-72쪽. 김승학, 『한국독립사』(하), 독립문화사, 1971, 31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6, 546쪽 서울농대, 『수원농학 70년』, 1976, 50-52쪽. 담양군지편찬위원회, 『담양군지』, 담양군, 1994, 140쪽.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강점기) 사회·사상운동자료 해제』 1, 2007, 67-7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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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 115 |
|---|---|
| 주소 | 전남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 11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고재천 공적조서』와 『동아일보』(1928년 9월 16·18일) 기사, 『독립운동사자료집』 13에서 관련 사실과 주소가 나와 있어 위치를 확인하였다. |














고재천 집(2022년 촬영)
고재천 집(2022년 촬영)
고재천 집 전경(2022년 촬영)
고재천 집 전경(2022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