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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태원·김율 생가 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멸실되었고, 새로 가옥이 들어서 있다.
정의 1907~1908년 형제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태원과 김율이 태어나 살았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07-8 후기의병
관련 조직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관련 인물 기삼연
관련 내용 김태원(金泰元, 1870~1908)의 본명은 준(準)이며, 호는 죽봉(竹峯)이며, 태원은 자이다. 그는 1907년 음력 9월 동지들을 모아 기삼연(奇參衍)이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합류하였다. 고창 문수사 전투에서 수훈을 세워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영광·고창·장성·함평·나주 등지를 무대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설날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서 광주수비대를 격파하였는데, 이때 천만포건(川滿布建) 조장과 임(林) 상등병을 사살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날 기삼연이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되자 기삼연을 구출하기 위해 추격대를 구성하여 뒤쫓았으나 구출하지 못하였다.

김율(金聿, 1881~1908)은 그의 동생이다. 그는 김태원과 더불어 거의한 뒤 1907년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하여 무장·법성포·고창·장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 2월 2일 기삼연 의병장이 붙잡혀 순국한 뒤, 김태원과 함께 기삼연 의진의 주력부대를 지휘하며 광주 일원에서 일본군을 유격전술로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일제는 이들 형제 의병장을 체포하기 위해 제2특설순사대를 파견하였다. 김율은 1908년 3월 말 광주 소지방 부근에서 체포되었고, 김태원은 1908년 4월 25일 어등산에서 일본 순사대와 교전 중 전사하였다. 이미 체포되어 있던 김율은 형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가는 도중 탈출을 기도하다가 일제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들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김태원에게, 1995년 김율에게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14일, 「의장탈거 전라남도」.
『독립신문』, 1920년 5월 22일, 「의병전」.
『죽봉청봉사적』, 1940,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583-598쪽.
홍영기 편저, 『의중태산』, 죽봉김태원의병장기념사업회, 1998,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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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나주군 거평면 북동리
주소 전남 나주시  문평면 상하길 17(북동리 250)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독립운동사자료집』2·3에서 김태원과 김율의 활동을 확인하였다. 『죽봉청봉사적』에 나주군 거평현 갈마지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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