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영릉의병 전투지-영해관아 및 읍성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건물 |
| 상태 | 영덕군에서 관아와 읍성을 복원하였다. |
| 정의 | 신돌석이 이끄는 영릉의병이 여러 차례 전투를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영해읍성 공격 |
|---|---|
| 관련 조직 | 영릉의병(寧陵義兵) |
| 관련 인물 | 신돌석(申乭石) |
| 관련 내용 |
1906년 6월 26일(음 5월 5일) 신돌석은 영해를 공격하였다. 이는 자료상에 드러나는 첫 영해 공격으로, 4월 6일 의병을 일으킨 지 80일 만이다. 신돌석은 한 번도 고향 영해를 정면으로 공략한 일은 없었다. 그런데 진위대의 탄압이 거세지자, 영해 읍성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신돌석은 영해군수의 죄목을 세 가지로 밝혔다. 첫째는 의병을 타이른다는 명목으로 대의에 항거한 죄, 둘째는 군대를 청하여 의병을 토벌하려고 한 죄, 셋째는 왜학을 받아들여 백성을 무도한 길로 들어서게 한 죄였다. 여기서 신돌석이 왜 고향 땅인 영해 읍성을 공격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진위대 병사들을 불러들여 자신을 공격하게 한 책임을 묻고, 그 응징 차원에서 영해 읍성을 점령한 뒤 군수의 죄상을 따진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의진을 공격하거나 토벌대를 부르지 말며, 또 왜학이라는 신학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그 뒤 1906년 11월 다시 영해읍을 공격하여, 수비대 군사를 죽이고 무기 확보하였다. 그러나 수비대의 반격으로 신돌석의 집과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다. |
| 참고 문헌 |
○ 「의병대장신공유사」. ○ 「신장군유사」. ○ 김희곤, 『신돌석 백년만의 귀향』, 푸른역사, 2001, 93-98‧234쪽. ○ 강윤정, 『시대를 뛰어넘은 평민의병장 신돌석』, 독립기념관, 2016, 88-91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의병항쟁사자료집, 1983, 411-415쪽. ○ 『황성신문』, 1906년 7월 3일자, 2면 3단, 「義兵揭榜」. ○ 「조선시대 영해 읍성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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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영해부관아 및 읍성 |
|---|---|
| 주소 | 경북 영덕군 영해면 예주3길 7 영해면사무소 (성내리 671-5, 671-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영덕군에서 복원한 영해읍성과 관아가 있어, 위치를 확정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