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남자현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 독립운동가 |
| 종류 | 집터 |
| 상태 | 남자현의 집은 멸실되고, 집 근처인 석보로 208(394번지)에 복원하였다. |
| 정의 | 만주에서 의열투쟁을 전개한 남자현이 만주로 가기 전에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길림사건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남자현(南慈賢), 김영주(金永周) |
| 관련 내용 |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은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19세에 안동시 일직면 귀미동 출신의 김영주(金永周)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1896년 7월 진보면 흥구동에서 있었던 의병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전한다. 유복자를 기르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평범한 여성으로 살던 남자현은 만 46세인 1919년 2월 말 망명길에 나섰다. 남자현은 잠시 서울에 머물면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어 만주로 망명하여 50세가 되던 1920년대 중반까지 교회를 설립하고, 여자교육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1927년의 ‘길림사건’은 그녀의 운동노선에 변화를 가져왔다. 길림사건은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독립운동지도자 47명이 중국 관헌에 검거된 사건이다. 독립운동계가 구명운동에 나섰고, 남자현이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길림사건 후 의열투쟁으로 전환한 남자현은 1927년 4월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잠입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는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만주로 돌아온 남자현은 1931년 10월 하얼빈총영사관에 갇혀있는 김동삼(金東三) 구출 활동을 펼쳤다. 1932년 9월에는 국제연맹조사단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고 쓴 혈서 전달을 추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33년 1월, 남자현은 다시 만주국 주재 일본전권대사를 처단하려고 하였으나 계획이 드러나면서 체포되었다.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6개월의 혹형에 시달렸다. 단식투쟁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끝내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김희곤 외, 『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 2006, 354쪽. ○ 김미옥, 「남자현」, 『안동문화』 창간호, 안동문화원, 1993, 182쪽. ○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 2면 5단, 「斷食한지 九日만에 人事不省되어 出監」. 『국민보』 1959년 5월 20일, 6단, 「애국투사」. ○ 남자현 초상화. 남자현 묘지, 『독립혈사』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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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 |
|---|---|
| 주소 |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3-6전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 기사와 『국민보』 1959년 5월 20일 기사에 관련 내용이 있다. 이병철 외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