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도현 생가-벽산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김도현 활동 당시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
| 정의 | 1896년부터 의병항쟁을 전개하였으며, 1914년 자결순국한 김도현이 태어나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태봉 전투, 을사늑약 |
|---|---|
| 관련 조직 | 선성의병(宣城義兵) |
| 관련 인물 | 김도현(金道鉉), 강창희(姜昌熙), 김동현(金東鉉), 김성수(金性洙), 이범철(李範喆) |
| 관련 내용 |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은 경북 영양 출신이며, 호는 벽산(碧山)이다. 김도현은 1895년 11월 단발령이 공포되자 영양지역 곳곳을 돌며 창의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호응이 없자 1896년 2월 17일 청량산에 들어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경북 북부지역을 돌며 활동하던 김도현은 3월 18일 예안의 선성의병(宣城義兵)과 합세하였다. 선성의병의 중군장을 맡은 그는 태봉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태봉전투에서 패하자 영양으로 돌아와 독자적인 부대를 만들어 1896년 10월 15일까지 경북 동북부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펼쳤다. 이는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장기간에 걸친 항전이었다. 김도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있자 대궐 앞에서 상소와 함께 자결할 것을 각오하였으나 주변의 만류와 집에 연로하신 부친이 계셨기에 귀가하여 도산서원 등 각지에 통문을 보내고, 곳곳에 방을 붙여 거병을 촉구하였다. 1906년 1월 초3일 5읍도집강으로 활동하던 포수 50-60명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군수 이범철(李範喆)이 끌어들인 안동진위대 병사들과 출동한 일본군에게 동생 김동현(金東鉉)과 종숙 김성수(金性洙) 등 여럿이 함께 체포됐으나 곧 해결되었다. 1906년 4월 근신 강창희(姜昌熙)를 통하여 고종의 밀조를 받은 김도현은 각지에 격문을 발송하고 다시 거병을 준비하다가 1907년 2월 1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6개월 동안 고초를 겪었다. 이후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에 힘썼다. 1914년 7월 14일 부친이 세상을 뜨자 상례를 다 치루고, 11월 초3일 집을 나섰다. 11월 7일 동짓날 일출시간을 기다려 영해면 관어대 앞바다 선수암(汕水巖)으로 나가 장엄하게 도해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 「행장」, 『벽산선생문집』.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2-의병항쟁사자료집, 1983, 32-33쪽. ○ 김희곤 외, 『영양의 독립운동사』, 영양문화원, 2006, 87-88쪽. ○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223쪽. ○ 김강수, 「한말의병장 벽산 김도현의 의병활동」, 『북악사론』 2, 북악사학회, 1990, 219-227쪽. 권영배, 「벽산 김도현(1852·1914)의 의병활동과 도해순국」, 『조선사연구』 20, 2011, 117-147쪽. ○ 김도현 영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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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소청동 |
|---|---|
| 주소 | 경북 영양군 청기면 벽산길 12 벽산생가 (상청리 298)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기려수필』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김도현 생가는 건물이 남아 있어 위치를 확정하였다. |














